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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건태 사회부장
선거의 해다. 깊은 불황의 그늘에 새해도 뭐 하나 나아질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희망고문’처럼 일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건 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제20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이제 100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국회는 선거구를 획정하지 못했다. 지난해 말로 예비후보 등록을 끝냈지만 헌재가 정한 선거구 획정 최종 시한을 넘겨 ‘1일 0시’부터 선거구가 모두 사라지는 미증유의 사태를 맞았다.

 이미 출사표를 던진 예비후보들은 자신이 싸워야 할 전장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현역 국회의원 역시 존재하지도 않는 선거구민에게 의정보고서를 보내는 웃지 못할 촌극을 벌이고 있다.

 선거구가 전면 백지화된 상황에서 법이 보장하고 있는 예비후보들의 선거운동은 물론 현역 국회의원의 지역구 활동까지 모두 있을 수 없는 일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실제 인천의 한 예비후보는 국회를 상대로 부작위에 의한 위법 확인 소송을 준비 중이다. 부산에서도 한 예비후보가 현역 국회의원을 상대로 한 ‘의정보고서 발송 및 배포 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했다. 앞서 세종시에 출마하는 한 예비후보는 현직 국회의원 전체를 직무유기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개정된 선거법은 부칙 2조 5항에서 ‘국회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일 5개월 전인 지난해 11월 13일까지 선거구를 확정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따라서 선거구를 획정하지 못한 국회는 따라서 부작위에 의한 위법행위를 했다고 보는 것이다.

또 선거구와 선거구민이 존재하지 않는데 현역 국회의원이 기존 선거구민을 대상으로 의정보고서를 발송 또는 배포하는 것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을 뿐더러 불법 사전선거운동이 될 수 있다.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일할 예비 국회의원과 현역 국회의원이 불법을 자행하고 있는 셈이다.

 기존 선거구가 전면 백지화되기 전인 지난해 말 선관위에 등록된 예비후보자는 전국적으로 246개 지역구에 843명에 달한다. 평균 3.4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이 중 인천은 12개 지역구에 50명이 등록해 제주와 세종시를 제외한 17개 광역시도 중 가장 높은 4.2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특히 선거구 조정이 예상되는 인천 중·동·옹진과 연수, 서·강화을은 이보다도 2배 많은 최고 9대 1의 경쟁률을 나타냈다.

 선거구가 획정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처럼 피선거권자가 몰린 데는 선거구 조정에 따른 불확실성에 대한 노파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 인물에 대한 지역 선거권자의 갈구와 인구편차에 따른 헌법 불합치에 따른 헌재의 결정 이유에 대한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입법 비상사태’라며 임시국회가 폐회하는 오는 8일 직권상정의 뜻을 천명했지만 여전히 여야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선거구 획정안을 고집하고 있어 불발될 가능성이 더 크다. 선관위도 이때까지 한시적으로나마 등록된 예비후보자들의 선거운동에 대해 단속을 유예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선거구 실종에 따른 불법적인 환경을 만들어 놓은 상황에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문제는 새 희망을 꿈꾸며 기대감에 넘쳐야 할 선거가 벌써부터 불법과 탈법으로 얼룩지면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불가침 기본권인 ‘행복추구권’마저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다. 선거구 획정을 둘러싼 정치권의 진흙탕 싸움이 정치 후진적 ‘밥그릇 지키기’로 비춰지면서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투표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자신들에게 ‘부메랑’으로 작용할 수 있는 국민적 ‘정치 절망감’은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여당은 ‘친박’에 이어 ‘진박’이란 신조어까지 만들며 진상을 부리고, 야권은 ‘탈당’이니 ‘분당’이니 하며 여전히 진영논리에만 갇혀 있는 형국이다.

 새해 또다시 희망을 꿈꾸는 유권자에게 ‘장밋빛’ 청사진은 아닐지라도 자신들이 정한 법이라도 잘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이라도 심어 줬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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