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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우 인천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130년 전 인천 개항 당시 제물포의 모습은 ‘가옥이 6~7채에 불과한 매우 한미한 지역’으로 묘사됐다. 일본인들의 교묘한 술책이었는데, 인천의 성장과 발전을 선도했던 주 세력이 일본인이었음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려 했던 의도였다. 그렇게 일본인에 의해 왜곡된 사실은 부지불식간에 오늘날까지 잘못 인용되고 있기도 하는데, 그런 속에서 전래의 고유 지명들을 왜식(倭式) 지명으로 바꿔치기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그러나 인천은 우리 민족의 역사가 동틀 무렵부터 이미 한반도 서해안 지역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어 단군(檀君)의 유향(遺香)이 한반도 곳곳에 전하고 있었다. 기원전 1세기께 비류에 의해 미추홀인 이곳에 백제의 왕도(王都)를 건설했고, 4세기 백제시대에는 바다를 통한 중국과 ‘최초’의 개항이 인천 능허대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이후 100년 동안 대중국 교류의 중심지가 됐다.

 고려시대에는 7대어향(七代御鄕)이라 해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인주이씨 집안의 여인들이 왕비가 됐고, 그 왕자는 군주로 등극했다. 당대를 통틀어 최고의 가문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 정부는 사사로이 바다에 나가 이익을 도모하지 못하게 하는 ‘해금책(海禁策)’을 단행했다.

그 결과 인천은 해양을 통해 문화의 다양성을 얻는 기회를 상실하고 평범한 농어촌이 되기도 했지만, 조선 초기 이래 이곳 성창포(城倉浦)에 수군 만호영을 두고 서해의 방어를 담당하면서 군항이나 상업항으로서의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또한 서구 원창동(元倉洞)과 동구 만석동(萬石洞)은 ‘창고와 곡물 단위’를 나타내는 지명으로, 이곳은 수도 한양으로 세곡(稅穀)을 운반하던 유통의 중간 거점지였다.

 1883년 개항한 인천항은 이미 개항된 부산이나 원산보다 항구로서의 입지 조건이 좋지 않았던데다가, 조수간만의 차이가 10m나 됐기 때문에 배가 접안하기 위해서는 만조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진입하는 최단거리라는 지리적 입지로 인해 신문물은 인천을 통해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시기적으로는 3번째로 개항됐지만 각국의 상공업시설과 종교·교육·체육·문화시설들이 빠르게 설립돼 갔다. 황해를 통한 외국과의 해상교통이 폐쇄된 지 500년 만에 다시 인천 지역사회가 ‘국제도시 인천’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천은 근대문화와 문물 수용의 통로였기 때문에 한국 역사상 ‘최고·최초’의 사실들이 즐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대가도 톡톡히 치러야 했다.

일제강점기 인천은 일본인 도시로 변해 한국인은 각종 생활편의시설에서 소외·격리됐고, 이 과정에서 많은 토지와 인력을 수탈당했다. 대부분의 농민이 몰락했고, 몰락한 농민은 노동 여건을 더욱 악화시켰다. 인천 지역사회는 철저히 일본화된, 일본인 중심의 도시와 농공단지로 변해 갔다.

 일제강점기의 질곡을 지나 광복의 기쁨도 채 누리기 전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북한군의 남침은 인천 지역사회에 다시 한 번 시련을 줬다. 인명의 피해나 주민 간의 갈등에서도 그러했지만, 일본이 남겨 놓고 간 공장과 시설로나마 가까스로 일궈 가던 경제가 거의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1960∼70년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있어서 인천은 그 선두에 있었다. 인천의 공단들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가 수출 위주로 전개되면서 이를 위한 각종 기간시설의 확충과 편의시설의 확대가 우선적으로 마련됐다. 인천내항의 도크 확장, 경인고속도로 건설, 경인전철의 부설 등이 바로 그러했다.

 지속된 경제발전은 인천시의 산업과 사회를 더욱 성장시켰지만 유구한 역사문화도시가 공업과 산업도시로 각인되기에 이르렀다.

 인천은 전근대 이래 개국과 왕도의 고장으로 명성을 높였고, 국방과 교통의 요지로 서해안의 동맥이었으며, 나아가 한국의 근대문화를 선도한 최고·최초의 상징적 도시였다.

그리고 시련과 좌절을 극복하고 오늘날 서울과 부산에 이어 3대 도시로 성장했다. ‘인천 가치의 재창조’는 인천 지역사회가 지난날 경험하고 축적한 다양한 역사적 토양을 바탕으로 진행돼야 하는 것에 두말 할 나위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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