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아름다운 전통가락을 후대에 전해주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죠."

남양주시 삼봉2리에서 삼봉두레풍물보존회를 이끌고 있는 김완기(80) 회장의 말이다.

그는 삼봉리의 지명에 대해 ‘비슷한 봉우리 3개’라는 의미라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의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된 삼봉농악은 ‘삼봉2리는 작은 스님들이 있으니 농악 쇳소리가 울려야 동네가 편하다’는 어느 고승의 말씀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여름이면 집집마다 한 명씩 나와 논밭매기 품앗이를 하는데, 이때 논밭 길을 돌며 흥을 돋우는 것이 삼봉농악이었다.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 어귀에 쌀 한말과 떡 등을 올려 놓고 상을 차려 굿판에 모인 사람들의 복을 비는 ‘고사반’이 축제의 시작을 알린다.

이어 마을을 돌며 덕담과 축언을 하는데, 각 가정에선 수로가 떡을 차려 대접하고 덕담과 축언을 받아 정겨움을 더한다.

축언의 대부분이 1년 농사 잘 되고 자손이 번성하라는 내용으로, 마을 사람끼리 정성을 담아 서로를 축복했다고 한다.

"저까지 3대를 내려오고 있는데, 14∼15살 즈음인가 밤에 화톳불을 놓고 무동도 서고 오등받침(무등놀이)을 했던게 아직도 기억에 선명해요."

이렇게 삼봉2리에서 농악이 시작되면 이웃동네와 강 건너 양평에서도 나룻배를 타고 구경을 왔다고 그는 회상한다.

워낙 유명하다 보니 양평군과 이웃 화도읍 등에서 초청을 받아 한마당 거하게 벌이곤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하는 모습을 자식이 보고 글로 남기고 머릿속으로 기억하려 노력하면서 그의 대까지 내려온 삼봉농악.

그는 한국전쟁 당시 영장을 받아 면사무소까지 20리길을 ‘무사귀환 하라’며 배웅해 준 삼봉농악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 편이 아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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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농악은 88올림픽 성화봉송에서도 퇴계원 사거리에서 마당을 벌였으며, 남양주시에 처음 이앙기(농기계)가 들어올 때도 굿판을 담당했을 만큼 지역사회에서 역할이 막중했다.

수년 전엔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보존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으며, 지난해엔 경기도대회에 남양주 대표로 출전해 장려상을 수상키도 했다.

"지금시대엔 신식 가락이 대부분이에요. 삼봉농악은 옛날 가락이죠.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이러한 전대의 보물인 삼봉농악의 명맥을 잇는데 정부와 민간 차원의 도움은 절실하다.

삼봉농악 회원 대부분이 70∼80대인 상황으로, 상모를 돌리는 건 배우려는 학생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을 정도다.

마당놀이와 굿거리 장단, 춤가락이 많은 삼봉농악의 특성상 40∼50대의 중간 세대가 관심과 애정을 갖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

정부 차원에서 우리 고유의 가락을 지킬 수 있도록 보존 정책이 수립되고, 농악의 사회화와 기금화 등이 어우러질 때 삼봉농악을 우리 아이들도 즐길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끝으로 "죽을 때 죽더라도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고 물려주고 싶어요. 먹고 살기 어려운 시국이란 건 알지만, 우리의 뿌리인 만큼 진심어린 사랑으로 지켜나갈 겁니다"라며 시원한 웃음을 남겼다.

남양주=조한재 기자 chj@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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