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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효성 소설가
러시아어 옆에 맞춤법 틀린 한글로 쓴 노랫말을 보는데 명치끝이 뭉클했다. 한국 노래도 러시아 노래도 북한 노래도, 노래를 부르는 그분들의 정서에 흐르는 흥이고 그리움이고 설움인 것이 보였다.

 고단했던 세월 지나 살만 해진 노년을 즐기는 그분들은 19세기 말 이후에 극동 러시아로 이주한 한민족의 2세이거나 3세 혹은 4세 분들이다. 고려말을 잘 몰라서, 고려글을 몰라서 미안하다는 말에 왠지 우리 마음도 죄송하고 고마웠다. 가물가물 기억나는 옛 노래를 따라 부르고 박수로 장단을 쳐 주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나 춤을 추며 아리랑을 합창했다. 서로 손 잡고 흥겨운 밀양아리랑을 부르는데 눈물이 났다. 그분들도 우리도 표정은 웃는데 눈에선 눈물이 흘러 서로의 어깨를 안았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이 5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극동지역인 우수리스크에는 2만5천 명 정도가 살고 있다. 우수리스크 인구는 16만 명으로 고려인 분포가 높은 지역이다.

 조선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고 고려인으로 호칭이 정해진 데는 한반도의 분단 역사에 기인한다. 고려인들은 이주 1세기가 넘는 세월이 흐르면서 남한도 북한도 아닌 소련연방의 한민족으로 독자적 역사를 일궈 온 문화에 자부심이 들어있었다.

 원래 조선인으로 불렸던 호칭은 얼마간의 멸시도 깔려 있었고, 잘살게 된 조국 대한민국에서 비호감으로 여겨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이 많았다 한다.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기 직전인 1988년 6월 ‘전소고려인협회’가 결성되면서 남한에서 꺼려 하는 ‘조선인’도 북한에서 싫어하는 ‘한국인’도 아닌, ‘고려인’으로 호칭 문제를 매듭지었다 한다. 현지에서는 고려인보다는 통상 고려사람으로 부른다.

 러시아 정부가 공식적으로 조선인 영구 이주를 인정한 연도는 1864년이다. 러시아가 베이징 조약으로 영토를 두만강 하류까지 확장시키면서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됐다. 1864년 초 함경도 사람인 최운보와 양응범이라는 분이 식솔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남우수리스크에 영구 이주해 촌락을 형성한 것을 시작으로 이주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모든 것이 낯선 이국 땅에서 자리잡아 살아가던 한인들은 1937년 스탈린의 명령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되고, 그 과정에 수만 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생겨났다.

중앙아시아를 벗어날 수 없게 했던 이주 금지가 소련이 붕괴되면서 풀려 다시 연해주로 돌아온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분들에게 들은 역사는 약소국의 비애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사실 우리가 우수리스크를 찾아간 목적은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님 유적지를 방문해 술 한 잔 올리고 싶어서였다. 막상 최재형 선생님 유적지는 문이 잠겨 있어서 아쉽지만 돌아서 나왔다. 아쉬운 마음에 찾아간 곳이 고려인문화센터였다.

이곳은 이주 140년을 기념해 한국에서 지어준 건물이다. 건물을 둘러보는데 2층 끝 공간에서 우리말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곳에서 고려사람을 만나게 됐다. 한국에서 가져온 술 한 잔 대접하고 싶다고 청해 술을 나누고 마음을 나눴다. 점심 무렵이라 그분들께 아래층 고려인 식당에서 식사도 대접해 드렸다. 그분들은 우리 넷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부산에 있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셨다는 80세 노교수님이 집으로 초대해 고려인 이주 정착 역사서를 줬다. 키릴문자로 쓰인 책 내용을 읽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작가라고 해서 자신들의 이주 역사를 꼭 읽어봐 달라고 하셨다.

또 김알렉산더 할아버지 댁에도 초청을 받았다. 86세의 연세에도 정정하신 할아버지는 4년 전 재혼한 할머니와 함께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며 우리를 환영했다. 성공한 사업가 아들의 대저택 옆에 아들이 지어준 집에서 노부부는 서양 영화 속의 행복한 노인들처럼 멋진 노후를 살고 계셨다.

 그분들이 러시아어로 적어 준 주소와 서툰 한글로 김분옥, 최영가 등등 이름을 써 준 분들에게 우리나라의 전통이 들어있는 선물을 보내려고 준비 중이다. 그분들은 스탈린의 정치 탄압과 강제 이주에 이어서 한글도 한국말도 전면 금지돼 우리말과 글을 잃어버린 후손들이다. 나는 한글 이름이 없지만 우리 이야기도 글로 써 주면 좋겠다는 부탁에 작가로서 책임이 느껴졌다. 자유여행으로 준비 없이 떠난 여행길이었는데 고려사람들과 행복하고 의미 있는 조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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