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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선거제도는 필수적이다. 근대 입헌국가의 원리인 국민주권주의(주권재민사상)는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관념을 내용으로 하지만, 국민이 주권을 실제로 행사하는 것은 수년마다 실시되는 선거에 참여할 때뿐이다.

그래서 때때로 현실정치에 실망한 국민들이 "선거 때 두고 보자"라고 벼르기도 하지만, 주권 행사의 기회는 사실 대단히 제한적이다.

 우리 헌법은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이 중에서 규범적·역사적으로 가장 의미가 큰 것은 보통선거의 원칙이라 하겠는데, 보통선거는 사회적 신분·재산·교양·성별 등에 의해 자격 요건을 제한하지 않고 일정 연령에 달한 모든 자에게 선거권을 인정하는 제도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실시된 보통선거는 미국과 유엔의 관리 하에 치러진 1948년 5·10 총선거였으며, 다른 나라들에 비해 결코 늦은 것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때까지만 해도 뉴질랜드 등 소수의 나라에서만 보통선거를 실시하고 있었다.

1776년 독립을 선언한 미국의 초기 선거법에서는 "선거권은 백인, 남성, 21세 이상, 재산 소유자, 납세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부여된다"라고 규정하고 있었고, 1920년에야 보통선거가 시행됐다. 프랑스는 1944년에, 일본은 1946년에 보통선거가 시행됐다.

 사실 보통선거의 원칙은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의 피와 땀, 희생과 노력에 의해 쟁취된 것이다. 지난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는데(제108주년), 이날은 1908년 3월 8일 미국의 1만5천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뉴욕의 러트거스 광장에 모여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 등을 쟁취하기 위해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날이다.

 지구상에 최초의 인류가 출현한 것은 약 300만~500만 년 전이라고 하는데,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기 시작한 역사는 겨우 100년 정도에 불과하다.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우리 국민들이 별다른 피땀을 흘리지 않고)우리나라에서 1948년 보통선거가 시행된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정치사를 뒤돌아보면 보통선거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이 수반됐던 점을 부인할 수 없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유권자들에게 고무신이나 막걸리를 돌리면 ‘표’가 나온다 해서 ‘고무신 선거’, ‘막걸리 선거’라는 말이 유행했다.

지금은 유권자들의 의식과 공명선거 분위기가 예전보다 많이 개선돼 고무신이나 막걸리를 돌리는 일은 없어졌지만, 아직도 한편에서는 여전히 금품·향응 제공이 은밀하게 행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 뿐만 아니라 당선되면 그만이라는 속셈에서 달콤한 허위·과장 공약으로 유권자를 속이는 일도 잦고, 혈연·지연·학연과 지역 정서를 교묘히 이용하거나 불공정한 공천으로 민심을 왜곡하기도 한다.

 한 나라의 정치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의식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만일 주권자인 국민의 선거권 행사가 금품·향응과 허위·과장 공약 그리고 혈연·지연·학연·지역 정서 등에 휘둘린다면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부정·부패정치’로 귀결된다. 그리고 주권자인 국민은 ‘우매(愚昧)한 대중’으로 취급돼 ‘중우정치(衆愚政治)’의 대상으로 전락되고, 저급한 사욕에 넘치는 정치인들의 ‘노예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려면 주권자인 국민의 ‘자주의식’과 ‘냉철한 판단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들의 한 표, 한 표가 민주주의를 올바로 세우는 벽돌이 된다는 인식을 굳건히 갖고 ‘소중한 한 표’를 의연하게 행사해야 한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쉽게 얻은 ‘보통선거’라 해서 그 의미를 가볍게 여긴다면, 이를 쟁취하기 위해 피땀을 흘린 수많은 인류의 조상들의 위업과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보름도 채 남지 않은 20대 4·13 국회의원 총선거가 국민 주권 행사의 올바른 실천의 장(場)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똑똑한 국민이라야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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