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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인천문화재단 대표
사실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떠돌던 이야기였는지 모르지만 고일(高逸)선생의 「인천석금」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전해온다. 바로 채동지(蔡同知)에 관한 이야기이다. 채동지는 거구에 아주 뚱뚱했던 사람으로,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던 전설적인 인물이다. 이 인물이 옛 인천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는 35세에 인천에 와서 환갑, 진갑을 지내고 웃터골 부근 현 인천여자중학교 못미쳐 길가에서 객사했다고 한다. 아마 쉰 이상 된 향토인은 유소년 시절에 이 거인을 날마다 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는 개건너(서곶)에서 왔다고 하며, 성은 채 가요, 이름은 그저 동지라 하고, 누구나 그를 채동지라고 불렀다."

 이것이 「인천석금」의 기록 일부다. 이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채동지는 양쪽 겨드랑이에 큰 비늘을 단 채 태어났다고 한다. 동네에 장사가 났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 부모가 후환이 두려워 비늘을 떼어 버렸다고 한다. 아이는 서너 살이 되도록 말을 하지 않았는데 신장과 체중은 유달리 크고 무거웠다는 것이다. 이인(異人)으로 일컬어졌던 채동지의 전설은 특히 그의 입속 침에 있었다. 그의 침이 영험해서 만병을 낫게 했다고 「인천석금」은 쓰고 있다.

 "채동지가 입에서 흘리는 침을 과자에 묻혀 먹으면 ‘백병통치(百病痛治)’라 해서 부녀자들이 그의 침을 구하러 다녔는데, 어린 소년과 젊은 청년이 근처에 가면 버럭 소리를 지르지만 젊은 아낙네와 중년 부인이 근처에 오면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었다.

이리해서 인천에서만 그의 이름이 높아진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소문이 퍼졌다. 남자보다는 여자들에게 이 괴걸인의 명성은 높았고, 그의 침을 바른 과자를 먹고 병을 많이 고쳤기 때문에 채동지는 무슨 영검이 있는 이인이라고 한참 떠들썩했었다. 그는 인천을 떠나 각지를 배회했다."

 고일 선생 말대로 채동지의 소문이 전국으로 퍼졌던지 1933년 11월호 「별건곤」 잡지에도 "소위 채동지라는 괴물도 어지간이 뚱뚱하야 그 사람의 침만 먹어도 병이 낫는다고 악을 악을 쓰고 차저갓던 녀자들이 각금 경풍을 하얏섯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채동지 이야기는 그보다 앞서 조선 말기 온건 개화파 관료였던 김윤식(金允植)의 일기 「속음청사」에도 나온다. 1913년 2월 19일자 일기에는 "有蔡同知者, 或云本姓李, 生有異蹟, 弊衣垢面, 乞食村家, 能知人家飯匙大小, 善治人病, 病人爲餠餌之屬, 往說已病, 蔡爲之啗其餠, 以其餘, 使病人食之, 病必愈" 운운하는 구절이 있다. 「인천석금」의 내용과 비슷하게, 남루하고 더러운 걸인 채동지가 날 때부터 행적이 특이하며 사람들 병을 잘 고치는데, 그가 먹다 남긴 떡을 병자가 먹으면 쾌유한다는 이야기다.

특이한 것은 채동지의 본성(本姓)이 이(李)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쓴 부분이다. 1914년 4월 6일자 일기에는 다시 채동지의 본성이 김(金)이며, 그의 신비한 침으로 두통을 낫게 했다는 이야기와 부녀자들이 병 때문에 찾아갔다가 채동지의 냉대로 허탈하게 돌아온 사연, 그리고 세간에 떠도는 채동지의 여러 괴사(怪事) 등을 적고 있다. 또 그의 외손녀가 손에 경련이 있어 채동지를 찾아가 세 차례에 걸쳐 떡을 바치고 그가 먹다 남은 것을 가지고 왔다는 내용도 있다.

 그 밖에 채동지에 관한 이야기는 한말 개화파의 한 사람이었던 윤치호(尹致昊)의 영문일기(1920년 11월 11일)에서도 볼 수 있다. 「인천석금」의 ‘침 바른 과자’ 이야기와 유사한 내용이다. 그러나 1935년 7월 21일 일기에는 채동지를 한낱 사기꾼(cheat)으로 적고 있다. 국어사전은 ‘채동지’를 "말과 행동이 허무맹랑한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윤치호와 비슷한 시각 때문인지 모른다.

 "그가 인천에 나타난 것이 45년 전 일이요, 그가 죽은 것은 18년 전 일인가. 그는 바람과 같이 나타나서 바람과 더불어 사라진 것이다." 「인천석금」에 따른다면 이 책이 나온 때가 1955년이니 채동지의 인천 출현은 1910년이고 사망은 1937년이 된다. 또 향토사가 이훈익(李薰益)선생은 채동지가 파주에서 김포, 서곶을 거쳐 인천에 왔다고 적고 있다. 파주에서는 채동지 이야기가 ‘아기장수 설화’로 대체, 전승되고 있으니 얼마간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울던 아이도 ‘채동지 온다’ 하면 울음을 그쳤다는 이인 채동지가 왜 인천을 찾았는지, 그리고 왜 전국을 배회하다 다시 인천 땅에 와서 객사했는지…. 고일 선생의 기록처럼 당시 내리예배당 어귀에서 서덜국과 막걸리를 팔던 술집 주인 배 씨가 그나마 채동지에게 따뜻한 국밥을 제공했기 때문이었을까. 한 세기, 인천 근현대사 속에는 이 같은 기이한 전설도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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