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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시인
우리 인천 선대(先代) 고일(高逸)선생이나 신태범(愼兌範)박사 같은 분들께서 쓰신 글 중에는 재미난 내용이 많이 있다. 특히 이런 일이 다 있었구나 할 만한 흥밋거리 야사(野史)가 눈에 띈다. 여기에 옮기는 ‘박미향의 국제 로맨스’도 그런 류의 이야기로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 일단이 전한다.

 이야기인즉 1931년 봄께 중국 순양함 해침호(海琛號)가 인천항에 입항했는데, 그 부함장 조수지(曹樹芝) 중교(中校)가 인천 용동권번(龍洞券番) 기생 박미향(朴美香)한테 반해 출항 일자를 늦추며 여러 날 정박해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 사연은 워낙 세간에 널리 퍼졌는지, 당시 잡지 「별건곤(別乾坤)」 제42호에 ‘조선 기생에게 붙잡힌 중국 순양함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이태운(李泰運)기자가 쓴 글이 실려 있을 정도다.

 당시 신문기사가 자세하지 않아 확인할 수는 없으나 고일 선생은 해침호의 입항 목적이 "물과 석탄을 공급받으려고 불시에 입항한 것"이라고 했다. 이태운이 소문을 들어 쓴 글에도 물론 석탄 내용이 있기는 하다. 아무튼 딱히 다른 목적이 있어서 기항한 것이 아니었던 까닭에 해침호 선장 방염조(方念祖) 상교(上校)도 입항 후 조선 기자들에게 22일까지 인천항에 있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해침호는 그러지를 않았던 것이다.

 "어느 듯 22일이 되엇스나 해침함대는 떠나지 아니하고 하루 이틀 지난 것이 25일까지 회색빗 외두 굴똑백이 해침함대는 소월미도 바다에서 사라질 줄을 몰낫다. 그리하야 인천의 젊은 작난꾼들이 모히는 곳마다 ‘중국함대는 석탄이 떠러저서 못간다네.’ 아니여, ‘부함장 나리가 요사히 어느 기생아씨에게 반하시여 참아 떨칠 수가 업서서 그런다네.’ 이러한 소문이 떠돌게 되엿다."

 "48시간이면 출항할 예정으로 중국 영사와 함께 공급 교섭에 성공했던 것이다. 중일 양측의 주최로 몇 차례 연회가 베풀어졌다. 용동권번 기생 박미향의 서비스가 만점이었는지, 미모에 정신을 빼앗겼는지, 이 젊은 중국 함장은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거의 반달 동안이나 박미향의 치맛자락을 떼어놓지 못했다."

 앞의 이태운의 글이나 뒤의 고일 선생의 것이나 떠나야 할 해침호가 그냥 머물고 있는 까닭을 기생 혹은 박미향 때문으로 적고 있다. 그 연유가 이렇다.

 "해침 순양함이 인천에 닷든 18일 밤에 인천 일류 료리점 린루(鱗樓)에는 청호한 여름 힌 양복에다 ‘금모근’을 느린 수명의 청년 해군장교를 주빈으로 한 아담한 연회가 잇섯는데 이것은 당일 인천에 입한항 막료들을 위로하기 위하야 인천부윤(仁川府尹)이 배설한 환영연이엇섯다.

 <중략> 술잔이 기우러젓슬 때에 부함장으로 잇는 조수지 중교의 눈에는 기모노 입은 일본기생보다도 백의에 조선기생에게로 마음이 쏠리기 시작하야 그 중에는 박미향이라는 기생에게 마음이 움직이게 되엇다. 둥글고도 기름한 얼골이 무엇보다도 정다워 보이엇스며 소리업시 웃는 미향의 우슴은 말할 수 업는 매력을 가지고 조수지 장교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엇든 것이다."

 그날 밤 연회는 밤이 깊어 끝났지만 인천의 각 중국인 단체들은 ‘눈치 빠르게 모국의 젊은 장교의 가슴속을 알아차리고는 애초 출항하기로 한 22일을 하루 지나 23일까지 연일 연회를 열고 박미향을 대령’시켰던 것이다.

 이태운의 기록에는 해침호의 출항 일정을 사흘이 늘어난 25일로 적고 있다. 따라서 전날 24일은 연회가 없었다. 그러자 참다 못한 조수지는 자동차를 미향의 집에 보내 군함으로 데려와 "놀다가 붉은 해발이 월미도 바다에 잠기엇슬 때에 선교루(船橋樓)에서 미향을 작별하게 되엇는데 미향을 귀빈으로 대립하야 쌍라팔을 불어 함례(船禮)까지 하여 주엇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조수지는 배가 떠나기로 돼 있는 25일 이른 아침부터 미향의 집을 찾아가서 그 이튿날 새벽까지 "만단설화를 하야 가며 사랑을 호소하다가 굿은 포옹으로 애끗는 최후의 작별"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해침호는 6월 29일 새벽 3시에 진남포항에 입항한 것으로 동아일보는 보도하고 있다.

 고일 선생은 박미향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 화장술과 옷맵시에 있어서 참신한 맛이 있었고, 인텔리풍의 멋진 스타일은 가장 세련되어 보였다"고 쓰고 있다. 아마 얼굴도 자태도 매우 예쁘고 세련된 데다가 미소 또한 다정스러워 남자들이 크게 매력을 느낄 만한 그런 여자였던 모양이다.

 과거 인천 땅에는 미색, 예기(藝妓)가 많았다는 선대들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젊은 중국 군인과 뜨거웠던 ‘박미향의 국제 로맨스’ 전말을 옮겨 본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으로 운영되는 지역민참여보도사업의 일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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