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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건태 사회부장
여럿이 중국집을 갔을 때, 대다수가 짬뽕 내지 짜장면을 주문하면 어쩔 수 없이 대세를 따르는 경우가 있다. 다수에게 인정되는 상황이라면 그와 반대되는 의견을 갖더라도 고립과 배척되는 것이 두려워 좀처럼 표현하지 못하는 현상을 ‘침묵의 나선 이론’ 효과라고 한다. 대학에서 언론학을 공부했다면 한 번쯤 들어봤을 여론 형성 과정의 핵심 이론이다.

1960년대 이 같은 이론을 주창한 독일의 언론학자 노엘레 노이만은 여론의 개념을 ‘양식 있고 책임 있는 시민의 판단’이 아닌 ‘따라야 할 모종의 압력’이라고 봤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심복이던 정치선동가 괴벨스와 함께 일했던 그의 입장에서 보면 강력한 여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실제 경험을 통해 알았을 것이다.

현실 상당수 언론학자들은 소수 의견이라 해서 핍박받거나 무시되지 않는 ‘지식사회’에서 더 이상 노이만의 이론은 통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침묵의 나선 이론’이 유효하다고 보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은 듯하다. 특히 지난 총선만을 놓고 봤을 때 그렇다.

결과적으로는 여당이 패했지만 투표 전까지 여론은 항상 여당의 압승을 예측했다. 후보 단일화나 공천 과정에서 진행된 여론조사 역시 민심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했다. 언론도 각종 여론기관의 발표 내용을 그대로 옮겨 여당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했다. 과반수 의석은 물론 개헌저지선까지 가능할 것이란 분석을 내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자 언제 그랬나 싶게 ‘민심은 천심’이라며 얼토당토않은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러다 여론조사에 문제가 있었다며 조사기관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더니 급기야 여론조사 무용론까지 제기하고 나섰다.

사실 여론조사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총선기간 언론을 통해 발표된 여론조사 중에는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오차한계가 ±10%p인 조사도 있었다. 최대 20%p까지 오차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또 수십만 유권자를 모집단으로 하면서 유효표본수는 고작 몇백 명 수준이거나 직장인은 받기도 힘든 집전화에만 의존한 조사가 대부분이었다.

이처럼 여론조사가 허술하게 이뤄지다 보니 선거기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여론조사 결과물 1천400여 개 중 단 한 건도 ‘여소야대’의 정국을 예측하지 못했다. 오히려 유권자들의 눈을 가리거나 왜곡하는 결과만을 낳았다. 신뢰할 수 없는 여론조사를 그대로 받아 적은 언론도 문제다.

 이번에도 언론은 후보들의 됨됨이와 그들이 내세운 정책에 대한 분석보다는 누가 더 우세한지 ‘경마식 보도’에만 치중했다. 후보들 역시 자신이 우세인 것으로 발표된 여론조사만을 SNS를 통해 유권자에게 쉼없이 퍼 날랐다. 일부 후보들 중에는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조사가 이뤄질 수 있게 여론조사 응대 방법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기도 했을 정도다.

선거기간 이처럼 여론조사에 매달렸던 것을 보면 누군가 의도했던 아니던간에 ‘침묵의 나선 이론’ 효과를 기대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여론조사 선구자로 불리는 조지 갤럽은 그를 비난한 한 매체를 상대로 "만약 민주주의가 인민의 의지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면 분명 누군가가 나서서 그 의지가 과연 무엇인지를 밝혀내야 한다"고 말했다. 여론조사의 중요성을 역설한 대목일 것이다.

그 전에 그는 여론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윤리적 원칙으로 ‘독립성’과 ‘객관성’이라고 했다. 어긋난 여론조사를 탓하기 전에 여론조사의 독립성과 객관성은 유지됐는지, 그리고 그 여론조사가 불순한 의도는 없었는지 정치권과 언론 모두 냉철한 자기반성이 필요해 보인다.

세월호 참사 2주기가 되자 앵무새처럼 ‘잊지 않겠습니다’하고 떠드는 주류 언론이나 선거 때마다 표를 달라며 허리만 구부리는 정치인부터 자신들이 여론을 움직일 수 있다는 오만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여론은 당신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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