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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순휘 정치학박사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집단 발포와 관련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월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광주하고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며 계엄군의 발포는 자신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8일 한겨례신문이 전격 보도한 ‘제5공화국 전사’를 보면, 1980년 5월 21일 오전 10시 50분 국방부에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주영복 국방장관에게 광주에 출동한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는 자리에 전두환 당시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참석했다는 자료가 나왔다. 이 자료는 전두환 당시 장군의 거짓말을 뒤집는 중요한 증거로써 재수사를 할 수도 있는 여지가 없지 않을 것이다.

 「제5공화국 전사」는 1979년부터 1981년 4월까지 5공화국 출범 전후 정치·사회 현안을 다룬 군보안기록물로, 1982년 5월 신군부 실세인 당시 박준병 보안사령관이 6권의 책자와 3권의 부록으로 구성했다. 이 기록은 3질만 발행돼 청와대와 보안사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고, 내용은 철저하게 통제돼 있다.

「제5공화국 전사」는 총 9권 약 3천800쪽 분량으로 1979년~1981년 4월 11대 국회 개원에 이르는 격동기의 중요 사건을 기록했다. 당시는 육사 출신 사조직 ‘하나회’를 핵심으로 신군부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이라 실세들이 거침없이 말을 하는 위기였다.

 전두환 장군이 36년이 지나는 지금까지 광주 발포 명령과 무관하다는 발뺌을 하는데는 그의 주장을 뒤집을 만한 증거라 부족한 것이었다면 신군부가 작성한 「제5공화국 전사」는 집필의 주체가 당시 보안사령부이기 때문에 조작과는 문제가 없다는 점에서 증거로써 신빙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이 자료에서 5·18 발포와 관련한 부분을 보면, "(80년 5월)21일 2군사(령부)에서는 사령관 진종채 장군과 작전참모 김준봉 장군이 헬기편으로 육본으로 올라와 참모총장(이희성 대장)을 뵙고 이러한 현지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였다"고 돼 있다.

 이어 "건의를 들은 참모총장 이희성 장군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하면서 ‘장관에게 직접 보고하자’고 하여 세 장군은 국방부장관실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국방장관실에는 장관을 비롯하여 합참의장 류병현 장군,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 수경사령관 노태우 장군, 육사교장 차규헌 장군, 특전사령관 정호용 장군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기술돼 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서 아무 일 없이 넘어갔을 리가 없다는 것은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것 아니겠는가? 이 비밀회의가 2시간쯤 진행됐고, 21일 오후 1시께 광주 금남로에서 시작된 시민에 대한 무차별 집단 발포는 오후 4시까지 있었다. 이 발포로 하루 만에 34명이 희생됐다. 그 후 계엄당국은 22일 12시부로 전국 계엄군에게 자위권 발동을 지시했다.

 이러한 「제5공화국 전사」의 기록에 근거해 본다면 광주 발포는 신군부의 비공식적 지휘라인에서 이뤄졌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럼에도 계엄사령관 이희성 장군이 검찰 수사에서 "(광주에서 집단 발포가 이뤄지기 전인)5월 21일 새벽 4시 30분부터 5시 45분까지 계엄사령부에서 참모차장, 작전참모부장, 계엄사 참모장, 치안처장, 보도처장, 계엄처장이 참석한 대책회의가 열려 자위권을 발동하기로 결정했다"는 진술을 근거하자면 이어서 오전 10시 50분께 신군부 실세들이 장관실에 모여서 결정한 것으로 진실이 좁혀진다.

 이러한 비공식회의는 당시 대외적 상징에 불과한 최규하 대통령을 무시한 채 이뤄졌다는 점에서도 문제성을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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