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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효성 소설가
계절을 알려 주는 광화문 교보문고 빌딩에 여름 글판이 걸렸다. ‘구부러진 길이 좋다. 들꽃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이준관 작가의 시 ‘구부러진 길’ 구절이다. 여름은 열기와 폭우로 뜨겁게 광풍을 몰고 올 테지만, 오늘 마주한 교보문고의 여름옷 입은 글판 세상은 느리고 고즈넉하다.

 서울 갈 일이 있으면, 아니 광화문 근처를 갈 일이 있으면 습관적으로 들르는 곳이 교보문고다. 내 첫 작품집이 세상에 나왔을 때 원로 문인이셨던 변해명 선생님께서 교보문고 신간 코너에 진열돼 있는 내 책을 봤다고 전화를 주셨다. 반갑고 고마웠다 하셨던 선생님은 수년 전에 먼 나라로 떠나셨다. 계절이 수없이 바뀐 지금도 교보문고 글판을 보면 선생님이 그립다.

 ‘구부러진 길’ 시에서 일부 더 발췌해 본다.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번화하고 번잡한 대로 광화문 거리다. 공중누각처럼 걸려 있는 글판에서 사람들은 희망인 듯 소망인 듯 현실의 팍팍함을 위안받는다. 그래서 마음이 말랑해져 품어가고 싶어진다.

 박노해 시인의 ‘직선은 없다’의 시 앞 구절에도 ‘직선으로 달려가지 마라 아름다운 길에 직선은 없다. 바람도 강물도 직선은 재앙이다. 굽이굽이 돌아가기에 깊고 멀리 가는 강물이다’라고 했다.

 바쁘고 분주한 세상이다. 품어서 함께하는 느림은 비효율이고 무능력이고 게으름으로 지탄의 대상이면서 역설적으로 소원의 대상이 돼 갈망한다. 더 빨리 목표 지향의 성과에 매달려 누적된 피로가 서로의 관계 맺음에 병목현상을 만들어 왔다.

 여름꽃은 원색이 없다. 흰색이 주류이면서 고작해야 옅은 파스텔톤의 색감이다. 작열하는 태양과 폭우와 폭풍을 이겨 내려면 강렬한 원색으로 도발적이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의외로 수수하다. 인간의 역사보다 길고 깊은 자연의 지혜인가 싶다.

 굽은 길을 걸어 본 삶은 자연인의 삶이겠지 생각한다. 질주로 쟁취한 메달은 금빛이지만 차갑고 냉정하다. 땀 밴 얼굴들과 비박도 함께, 걷고 쉬기도 함께, 가슴을 열어 속내를 드러내고 들어주는 시간도 함께 나눈 굽은 길 친구는 위로와 용기와 격려와 비난까지도 진정성이 담겨 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봐야 하는 굽은 길에는 세상의 많은 것이 담겨 동행한다.

 태생적 느림보인 내 별명이 나무늘보다. 앞서서 재빠르게 달려 본 기억이 없다. 먼저 발견한 권력으로 튼실한 과실을 냉큼 따 본 적도 당연히 없다. 바람결에 시원하다 참 좋다 느긋했고, 햇살에 몸 내주어 광합성하면서 창 던져 사냥 한 번 해 보지 못한 터라 짜릿한 성취 경험이 없다. 굽어진 저 길 돌면 어떤 풍경이 나올까, 동화 세상을 기대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을 이만큼 걸어온 것이 신통해진다.

 현실과 이상은 늘 상반된 세상이다. 사람들은 굽어진 길에서 평온을 기대하지만 현실의 삶은 직선으로 곧장 성취하기를 원한다. 이도 저도 아닌 나는 태생적 느림을 벗어날 재간이 없어서 갈등을 한다. 아주 놓아 버리지도 못하고 선두 그룹을 쫓아가기에는 버겁다.

 젊지 않으니 서너 고비는 넘긴 셈이고, 앞으로도 몇 고비가 남아 있겠지만 굽은 길이 익숙하니 자책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결국 직선 길을 택하든 굽은 길을 택하든 의미도 가치 부여도 본인 몫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름의 시작 6월이다. 6월에 이 세상에 온 나는 이생에서는 여름꽃이다. 굽어진 길에서 튀지 않게 스며들어 어울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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