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떠밀려 온 사람들의 마을 ‘만석동’

황규철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 회장은 1953년 동구 만석동 삼화제분 옆에서 태어났다. 만석동을 전국에 알리게 한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창작과비평사·2000)」의 무대가 바로 황 회장의 고향이다.

만석동은 김중미 작가가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에 소개한 것처럼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 형성된 작은 인천이다.

300만 도시 인천이 지역의 토박이들로 형성된 도시가 아닌 것처럼 괭이부리말 만석동은 이곳 토박이들로 형성되지 않았다. 오히려 삶을 이어가기 위한 마지막 종착역처럼 가난한 전국의 민중들이 모여서 형성된 마을이다.

일제는 한반도 수탈을 위해 항구와 가까운 만석동 일대에 밀가루 공장과 옷 공장, 목재 공장을 세웠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위해 조선소 등을 세우면서 가난한 식민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에는 황해도를 비롯한 북쪽의 동포들이 인천으로 모여들었고,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농촌의 터전을 잃은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등에서 농민들이 인천을 찾았고 가장 싸게 정착할 수 있는 만석동에 자리잡았다. 황 회장은 그들의 고단한 삶을 지켜보며 성장했다. 인천 사람인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태어난 집이 만석동 삼화제분 옆이었습니다. 동인천역에서 구름다리를 넘어오는 만석동 초입이었을 거예요. 그때만 해도 동일방직이나 대성목재, 판유리 공장에서 일하는 분들이 동인천역에 내려 우리 동네로 물밀 듯이 들어왔지요. 판유리 공장이나 대성목재로 가는 도로가 꽉 찼을 정도였습니다."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에서 묘사한 것처럼 한국전쟁이 끝난 1950~60년대 만석동은 전국 각지에서 돈을 벌기 위해 모인 노동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들은 물론이고, 한국전쟁 당시 북에서 내려온 다수의 피난민들도 만석동 구석구석마다 자리를 잡으면서 만석동은 전국 팔도 사람들이 함께 부대끼며 사는 동네가 됐다.

"제가 어릴 적엔 지금하고는 달리 모든 집이 다 문을 열어 놓고 살았어요. 친구네 갔는데 밥때가 되면 먹을거리가 흔하지 않은 시절임에도 ‘밥 먹고 가라’고 하셨어요. 그때가 삼양라면이 처음 나왔던 때인데, 라면 하나에 물을 흠뻑 넣고 김치와 같이 끓여 찬밥을 말아 먹기도 했지요. 저희 부모님은 황해도에서 피난 나오신 분인데, 당시 만석동에 유독 피난민이 많았던 것 같아요. 친구들을 보면 부모님들이 황해도가 제일 많았고 함경도, 평안도 분들도 있었어요."

당시 괭이부리말 아이들에게는 바닷가가 수영장이었고, 자유공원이 썰매장이었으며, 용현동 갯골수로 근처였던 옛 낙섬과 야적장이 놀이동산이었다.

"초등학교였을 겁니다. 비 오는 날 자유공원에 가면 경사가 져 있으니까 물썰매를 타고 놀았어요. 다른 애들은 만석동 바닷가에서도 많이 놀았는데, 우리 집은 가지 못하게 했어요. 물에 빠져 죽은 친구들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낙섬에서 죽은 친구들도 의외로 많았고. 또 지금 만석비치 자리 바로 밑이 야적장이었어요. 기차도 다니고. 거기서 바다 위에 띄워 놓은 원목 위를 뛰어다니는 놀이도 했었지요. 사람들은 거기서 원목 껍질을 떼어내 처마 밑에서 말렸다가 겨울에 땔감으로 사용하고 그랬어요."

전국에서 만석동에 모인 피란민과 농어민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돈이 모이면 만석동을 떠나는 것이 소원이었다.

# 만석동에 모인 팔도민이 인천 전 지역으로

황 회장 가족도 만석동을 떠났다. "그래도 우리는 만석동에서 잘사는 편이었어요. 아버님이 술 도매상과 운수업을 하셨는데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도화오거리에 생긴 국민주택으로 이사를 갔지요."

서른도 안 돼 세상을 등진 아버지의 운수업을 이어 받았다. 하지만 사업 경험도 일천한데다 돈에 대한 개념이 없던 황 회장은 방탕한 생활을 했고, 불과 2년 만에 아버지의 사업을 말아먹었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에게 건설업을 하는 아버지 친구가 입사를 권유했고, 그것이 인연이 돼 이후 건설업에 진출하게 된다.

▲ 황규철(뒷줄 왼쪽) 회장의 어린시절.

"아버지가 하시던 운수업을 물려받았는데 젊은 나이에 돈에 대한 개념이 없다 보니 조금 방탕하게 생활했고 2년 만에 다 들어먹었지요. 그러다 아버지 친구분의 소개로 건설업과 인연을 맺게 돼 나중에는 건설사를 인수하게 됐고, 섬 공사를 맡아 하면서 본격적인 사업을 하게 됐습니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맞기 전까지 그렇게 1990년대 호황을 누렸고, 다시 2000년대 들어서 건설 붐이 일면서 건설업계에 또 한 번의 황금시대를 맞는다.

하지만 이후 장기적인 불황이 이어지면서 건설업계는 물론 거의 모든 업종이 타격을 받는다.

# 내 물, 네 물 찾지 말고 우리는 하나의 인천 짠물

"인천이 사실 질적인 면보다 양적으로 많이 변했어요. 저는 건설업을 하는 사람이라서 남들처럼 조목조목 말하진 못하지만 인천이 다른 지역에 비해 박물관이나 대형 콘서트홀 등 문화시설이 부족한 것 같아요. 인천이 서울과 가깝다고는 하지만 시민들이 지역 내에서 충족할 수 있는 문화적 인프라가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아파트만 들어선다고 도시가 발전하는 건 아니잖아요."

과거 경기도 인천이었던 시절과 달리 우리나라 3대 도시로서 양적 팽창은 이뤘지만 그에 따른 질적 기반도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정체성도 좀 부족해 보여요. 서울은 그렇다 치고, 부산이나 대구 사람들 보면 정체성이 대단하잖아요. 인천도 새얼문화재단이나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등에서 지역 정체성을 살리기 위해 몇 년째 활동을 하고는 있는데 조금 부족해 보이긴 합니다. 다른 지역은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들이 우리는 만들어서 하고 있는 거잖아요. 인천에 왔으면 자기 고향을 찾기보다 그냥 인천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바닷물에 여러 강물이 모였는데 내 물, 네 물 찾기보다 그냥 물이라고 생각해야지요." 인천에 있으면 그 순간부터 인천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발동해야 한다는 얘기다.

"인천 공동체에서 하나의 발전 방향을 논의해야 한다고 봅니다. 고향이 어디냐를 따지고 별도로 모이기보다는 인천에 왔으면 모두가 인천 사람이라는 인식 속에서 말입니다. 인천에 사는 사람들끼리 정말 좋은 인천을 만들기 위해 과거나 고향은 따지지 말고 서로 하나로 뭉쳐 공동의 발전을 위해 나섰으면 합니다. 글=이병기 기자 / 사진=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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