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인천 사람입니다." 임남재 전 인천시의사회 회장은 서두부터 ‘인천인(仁川人)’임을 단단히 못 박고 시작했다. 그의 나이 만 77세, 인천에서 살아온 햇수 63년. 임 전 회장은 "이북에서 태어났지만 그곳에서 있었던 날보다 인천에서 머문 날들이 훨씬 더 많다"며 그 긴 시간 동안 학문에 힘썼고, 일터를 꾸렸고, 가정을 일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역시 인천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가 인천시민들에게 말을 건넨다

. 그는 "인천은 지난 60여 년 동안 엄청난 지역 발전을 이룬 동시에 대한민국 성장·발전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곳"이라고 한다. 임 전 회장은 ‘근대 문물이 안으로 들어온 통로이자, 우리 문물이 밖으로 나가는 통로’인 도시 인천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가 고백하는 인천 사랑 얘기를 들어 보자.

# 인천에 오기까지

임 전 회장은 1939년 이북 원산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인 1948년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미 김일성 체제가 갖춰졌던 때였어요. 당시 부모님은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 직업을 갖고 계시진 않았지만, 그래도 도저히 안심하고 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이 드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월남하기로 결심을 굳히셨던 거고요." 그의 가족은 부모를 포함해 7명이었고, 그는 겨우 초등학교 3학년에 불과했다.

26-1.jpg

임 전 회장처럼 8·15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북한 주민들이 남한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인천에는 황해도에서 이주한 정착민 대다수가 둥지를 틀었는데, 현재 이곳에 거주하는 북한 출신 주민 수는 70만 명에 이른다.

# 1950년대 인천은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그의 가족은 서울을 거쳐 1954년 인천에 정착했다. 경찰로 일하던 아버지가 인천 부평으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 인천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살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다만 부평은 좀 달랐죠. 미군 부대가 있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군부대와 연계해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아 자연스럽게 상인들이 몰려들어 상업도 발달했습니다. 이 때문에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풍족한 생활을 하기도 했고요."

그는 율목동에 있던 인천고등학교(현 석바위)에 진학했다. 부평에서 동인천역까지는 기차를 이용해 통학했다.

"요즘처럼 교통수단이 잘 발달돼 있지 않다 보니 재밌는 일들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제대로 된 객차가 따로 없어 사람들은 화물칸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아 이동해야 했고, 기차 운행이 수시로 중단되는 탓에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습니다."

임 전 회장은 "기차가 지금처럼 제시간에 오지 않으니 거의 매일 아침 학교에 늦고 수업이 끝난 뒤에는 집에 가야 하는데 기차가 끊겨서 밤중까지 가지 못하는 그런 날들이 숱하게 많았다"고 회상했다.

지금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도 많이 벌어졌다고 한다. 한 번은 절도범들이 기차 선로를 따라 서울까지 연결된 휘발유 송유관을 터뜨려 인근 논에 휘발유가 고이면 이를 퍼 담아 팔았다. 문제는 당시 화물열차가 석탄으로 운행된 관계로 휘발유가 고인 논을 지나다 불꽃이 튀기라도 하면 화재가 발생해 기차가 멈춰 서기 일쑤였다.

#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학교 의대에 진학했고, 1971년 부평에 ‘임소아과의원’을 개원했다. 그때만 해도 인천에는 병원이 거의 없었다. 10개도 안 됐다. 1970년대 인천시는 중·남·동·북구로 나눠져 있었는데, 부평이 있는 북구, 즉 지금의 부평구와 서구, 계양구는 북구로 묶였었다. 서구와 계양구 지역에는 병원이 하나도 없었다. 당시 인천시 인구는 50만 명에 미치지 못했고, 북구 인구도 채 10만 명이 되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불과 중·남·동·북구 등 4개 구로 이뤄져 있던 경기도 인천시가 인천직할시로 승격됐고, 이후 중·남·연수·남동·동·부평·계양·서구와 옹진·강화군 등 8개 구와 2개 군이 더해져 10개 군·구로 늘어났습니다. 인천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됐고, 마침내 인구 300만 명 돌파를 앞둔 거대 도시로 성장·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의사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인천시 성장·발전에 보탬이 되고자 했다. 1994년 제5대 인천시의사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인천시의사회는 의사의 권익을 지키는 이익단체이자 동시에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공익단체다. 의사회는 1946년 경기도의사회 인천지부, 회원 42명으로 시작해 1981년 대한의학협회 인천직할시지부로 새롭게 출범했다.

26-2.jpg
이후 1995년 인천시의사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강화군과 옹진군을 포함시켰고, 지금까지 12대 회장을 선출했으며 회원 수는 3천 명에 이른다. 의사회는 의료제도 개선, 의료분쟁 예방, 의사 연수교육 등 의사를 위한 사업과 지역사회 봉사활동, 건강생활 캠페인 등 시민을 위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임 전 회장은 회장 재임시절 인천뿐 아니라 국내와 국외에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한 이웃들을 찾아가 의료봉사활동을 펼쳤다. 충청북도 음성군에 위치한 꽃동네 사회복지시설을 돕기 위해 지원품을 모집해 보내 줬고, 몽골 의료봉사활동도 지원해 줬다. 그 밖에도 불우 이웃, 노인을 돕는 일에 힘을 보탰고 맹인복지회관 건립기금도 지원했다.

2004년부터는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 제10대·제11대 회장을 역임하며 인천을 넘어 대북 지원사업의 중심체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회장 재임시절인 2005년 남북 이산가족 화상 상봉장의 문을 열었고, 2006년 금강산에서 열린 제14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참석해 적십자 활동을 벌였다.

"적십자사 인천지사 회장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지역에서 어렵게 살아가시는 분들, 나이가 들면서 몸이 불편해지신 분들 한 분, 한 분을 찾아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지원해 줬죠. 회장을 하면서 느낀 것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우리 모두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대한민국에 하고 싶은 말은 ‘인천’

"인천처럼 하면 된다." 임 전 회장이 지금 대한민국에 하고 싶은 말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갈등과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념 갈등, 지역 갈등, 세대 갈등, 계층 갈등…. 하지만 인천은 어떻습니까. 전국 팔도의 지역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인천입니다. 어디 모여 있기만 합니까.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고 상생하는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다시 한 번 ‘인천처럼 하면 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천에 사는 어른들이 화합의 역할을 잘 감당해 줘 인천을 넘어 대한민국 전체가 화합의 길로 나아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글=조현경 기자 / 사진=최민규 기자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