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 고(故) 서상록 삼미그룹 부회장이 ‘식당 웨이터’로 변신해 세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당시 서 전 부회장은 30여 년간 이어온 기업 총수의 명예와 권위, 부유한 삶을 접고 롯데호텔 프랑스 식당에서 견습 웨이터로 4년 3개월여간 일했다.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살았던 그는 ‘영원한 현역’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그 호칭은 지금도 회자된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요즘 ‘사오정(45세면 정년)’, ‘오륙도(50~60대가 회사에 남아 있으면 도둑)’라는 신조어는 오래된 얘기다. ‘환갑은 곧 정년’이라는 공식도 마찬가지다.

 창업 역시 그렇다. 치킨집은 하도 많아 망하기 일쑤고, 한 집 걸러 있는 커피 전문점도 언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는 세상이다. 이런 세태에 자신의 밥벌이 전공보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사람이 있다. 성남시청에서 9급 말단으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경남기업㈜ 상무(보) 출신의 김영국(57)씨가 주인공이다. 지난 7일 성남시 분당구청 1층 사회복지과(통합조사관리2팀)에서 김 주무관을 만나 담소를 나눴다.

▲ 성남시 분당구청 사회복지과(통합조사관리2팀)에서 김영국 주무관이 전화로 민원업무를 보고 있다

# 옛 이리시청(현 익산시청)에서 시작한 공직, 35년 후 성남시청에서 다시 시작

김영국 주무관은 2014년 7월 사회복지사 2급 자격으로 시간선택제 공무원으로 임용됐다. 기초연금 수급 담당인 그는 금융 등 전산망을 통해 수급 대상 여부를 판단하는 관리 업무를 맡는다. 하루에 4시간만 근무하고 전화 응대나 방문 민원 등 통상업무는 여느 공무원의 모습과 같다. 그의 공직생활은 여기가 처음이 아니다. 35년 전인 1979년 7월 이리시청(현 익산시청)에서 공무원으로 4년여간 근무한 적이 있다. 전북 정읍의 농촌 출생인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이 힘들자 학비를 벌 목적으로 공직자로 사회 첫걸음을 뗐다. 그 길을 이어왔다면 현재 5급 사무관이나 4급 서기관급 자리에 올랐겠지만 후회는 없다.

그는 "당시에도 공무원이 안정적이고 경쟁도 심하지 않아 어린 마음에 공직을 선호했던 것은 맞다. 군 제대 후 딱히 직업 선택이 어려울 것 같아 공무원 생활로 사회를 시작했다"며 "하지만 급여도 별로고, 그 시절 공직문화에 실망을 느꼈기 때문에 그때의 결정을 후회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사직 후 퇴직금 24만 원으로 재수를 시작한 그는 다음 해 한양대 경영학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 외국계 기업인 유한킴벌리 재무팀 근무를 시작으로 한국 경제가 호황을 누리던 1980년대 잘나가는 기업 임원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 1991년 (주)한양 재직 시절, 동료들과 도봉산 등반 후(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 개발 붐을 탄 빅(BIG)4 건설사에서 굴지의 대기업 임원까지 승승장구

유한킴벌리에서 근무한 후 그는 ㈜한양으로 옮겨 국내 건설 붐을 이끈다. 당시 건설업계는 현대, 한양, 우성, 한신이 ‘BIG 4’로 불리며 서울 강남 등 택지 개발과 분당, 일산 등 1기 신도시 아파트 건설사업을 주름 잡던 시절이었다. 입사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에게 인생을 바꿀 기회가 찾아온다. 시행사가 없던 시절 업계에서도 생소한 민간 개발 사업을 맡았다. 부지 매입 후 주택이나 상가를 짓고 분양을 통해 수익을 내는 것이 통상적이라면 민간 개발은 토지주들과 합작해 부지를 개발하는 사업이다. 토지 매입 절차 시간을 줄일 수 있고, 무엇보다 기업의 자본과 역량이 튼튼하니 토지주들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사업 성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딱딱한 관급 공사와 다르게 민간을 대상으로 하는 영업이다 보니 흥미도 있고, 기업의 매출 상승도 따랐다. 김 주무관이 당시 민간 개발로 지은 아파트 등은 전국적으로 5천여 가구에 이른다.

사원에서 부장까지 고속 승진해 지속될 줄만 알았던 그의 상승세는 IMF 외환위기로 고비를 맞는다. ㈜한양이 채권단 관리(기업회생절차)에 들어간 뒤 그는 ㈜우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우방 역시 IMF 외환위기 여파로 힘들어지자 그는 다시 경남기업㈜에 스카우트됐다. 김 주무관은 그때 고 성완종 대아그룹 회장과 인연을 맺는다.

# 경남기업 임원에서 실업자로, 중년의 뒤늦은 깨달음

경남기업에서도 그는 앞만 보고 달렸다. 2000년대 초 국내 부동산 시장이 활황세를 보이며 민간 개발 사업 등 건설 부문이 날개를 달았다. 그는 맨몸으로 자수성가한 성완종 회장을 4년여간 보필했다. "그는 일밖에 모를 정도로 사업에 열중했다. 매주 임원들과 산행을 해도 업무 얘기는 끝이 없었다.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고 느꼈다"고 당시 성 회장을 회고했다.

그는 본부장을 거쳐 이사, 상무(보)까지 승진하며 일취월장했고, 연봉 1억 원대의 소위 ‘잘나가는 기업인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2008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건설경기는 곤두박질쳤다. 그의 입지도 흔들렸다. 명예퇴직을 하게 된다. 그는 "베이비붐 세대들이 그렇듯, 운 좋은 환경에서 앞만 보고 달리면 되는 줄 알았고, 언제든 내 분야를 살릴 줄 알았다"며 "뒤돌아보니 이 모든 게 사치이자 착각이었고, 사회는 냉철하다는 때늦은 생각을 갖게 됐다"고 전했다.

▲ 2006년 경남기업 상무시절, 구미문성 경남아너스빌 모델하우스 개관식(오른쪽에서 두 번째)

# 좌절 속에서 사회복지를 향한 꿈

그가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게 된 것은 고령화에 따른 사회복지 분야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부터다. 건설사 시절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주택 수요 등을 전망해 온 그에게 사회복지의 확대는 필연이라고 생각했다. 공무원 임용 시험 나이 제한 폐지 소식도 새로운 도전에 대한 희망을 걸기에 충분했다. 부인과 두 아들의 응원 속에 고시 삼매경에 빠진 그는 단 1년 만에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획득했다. 2번의 낙방 끝에 도전한 시간선택제 공무원에 합격한다.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은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친다. 10분의 1로 줄은 월급은 그렇다 하더라도 사업 현장만 다니며 컴퓨터와는 담 쌓고 지냈던 그가 모든 업무를 전산으로 해야 하는 부담이 컸다. 게다가 동료와의 많은 나이 차이는 스스로 적응하기 힘들게 했다. 하지만 그는 무조건 일만 했던 경제 전성기 시절보다 늦깎이 도전으로 성취한 지금이 더 행복할 때가 많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컴퓨터 배우랴, 업무 파악하랴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하며 누구에게 말 못 할 맘고생이 많았다"며 "이제는 팀(조직)에 내 경륜과 경험이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지 헌신할 마음도 준비돼 있다. 나이와 상관없는 도전의 변화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해 준 현실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 도전의 첫걸음이지만 늦게나마 변화한 삶이 언제든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을 만든 것 같아 행복하다"며 "몇 년 안 남은 정년 이후에는 홀몸노인 등 사회적 불우 이웃을 돕는 봉사자로 살아가고 싶다"고 자그마한 소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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