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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효성 소설가
올 여름은 전 세계가 폭염으로 끓고 있다. 이라크가 53.9℃로 살인적인 기온 경신을 하고 중국 상하이도 40℃를 넘나들면서 고온 오렌지색 경보가 발령됐다고 한다. 해마다 여름은 폭염을 동반하지만 유난히 더운 올 여름은 세계기상기구(WMO)의 기상 관측 사상 가장 더운 해가 될 것이라고 예보했다.

 몇 해 전 내리 3년을 대이작도로 여름 피서를 다녀왔었다. 대이작도는 피서객을 유혹하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섬이다. 섬에서 잠깐 배를 타고 이동하면 하루에 두 번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래섬 ‘풀등’이 있고 섬 중앙에는 부소산이 있다. 키 159m. 뭍에서 보면 산 축에 끼지도 못하는 왜소한 높이다.

그러나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치만큼은 비경이다. 선착장 반대편 길쭉한 섬의 끝에는 교실 한 칸이 전부인 폐교 개남분교가 있다. 수채화 같은 러브 스토리를 간직한 폐교는 섬마을 선생님의 영화 촬영 장소이기도 하다. 한여름 땡볕 아래 검붉게 익은 불가사리가 풀등에 누워 뻣뻣하게 굳어 있고, 껍질까지 노릇하게 구워진 조개는 부드러운 속살을 바닥에 붙이고 죽은 듯 기회를 엿본다.

단잠처럼 찾아온 시간이 지나면, 풀등은 수중 잠수를 시작한다. 야들야들한 속살이 바닷물에 잠겨 들고 부드러운 물살에 무수한 발자국들을 게워낸다. 풀등은 하루 두 번, 온전히 몸을 내보이며 햇볕을 쬐고 일광욕을 한다.

 지나친 선탠으로 물집이 생길 것도 같은데 작열하는 태양 광선에서 비켜난 오전과 저녁 시간대라, 풀등의 결은 곱고 조신하다.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모래섬은 외롭고 위태로워 보이지만 긴 세월 끄떡없이 그 자리 그대로다. 큰 사리 때면 길이 5㎞, 폭 1㎞의 거대한 몸통을 뭍으로 만들어 바다 위에 모래사막을 창조한다.

신기루 같은 환영이 몇 시간 동안은 진실이다. 풀등에서는 오로지 걷는 일만 있어 걷고 또 걷는다. 두 발로 디딘 모래땅은 조바심 내는 발자국을 안심시키고 단단한 속내를 보여주며 흔들림이 없이 자신을 지킨다. 모래섬에 내린 사람들은 갯골 물길 따라 자박자박 걸어보고, 앞장서 뚜벅뚜벅 발자국을 내보고, 무수한 발자국을 종종종 따라가 보고, 불가사리, 조개가 낸 길을 눈으로 걸어본다.

 내 의지를 시험하며 의미를 부여해보는 시간이 머리 아프면 미리 준비해 간 낚싯대로 낚시를 하거나, 모래펄 위에 얹혀 쉬고 있는 조개나 소라를 건져 올리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도 좋다. 정박 중인 배에 승선한다.

모래섬이 바닷물에 잠겨든다. 파도에 흐트러지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풀등이 대견해 보인다. 대이작도의 태양은 활활 타는 열기로 폭염이 되고, 분방한 화증을 조절할 완급이 없어 거침없이 일광을 퍼붓는다.

산마루에 걸린 바람이 부소산 정상으로 구름을 불러 여름의 기운을 숙여보려 애를 쓴다. 부소산 정상에 구름이 언덕을 만들고 서풍이 불어올 듯한 조짐을 보인다. 여름 동안 잘 익은 바위들은 나이테를 만들어 원숙미로 노련해진다.

이윽고 탱글탱글 솟은 해가 기울면 대이작도엔 노곤해진 햇살이 비쳐든다. 때맞춰 식감 부드러운 바람이 소금 간을 하고 섬으로 찾아든다. 한낮의 바람은 부는 족족 팽나무에 걸려 자린고비 소리만 듣는데도, 휴가객들은 단물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환호성을 지른다.

 지금은 길게 드리운 해의 붉은 그림자를 바라보며 섬도 사람도 휴식 중이다. 사연만큼 오래 산 팽나무 밑 벤치에 앉아 로맨틱한 사랑을 응원했다. 오래된 러브 스토리는 폐교처럼 바래가고, 섬마을 선생님 영화 촬영지란 표지석만 홀로 빛나고 있다.

세월 저 편에 섬처녀 순진한 가슴처럼, 붉게 타오르는 해당화가 함초롬히 피어 있다. 밤이 깊어지는 대로 달도 기운다. 해무가 내려앉은 밤바다는 바닷물이 차올라 만수위를 향해간다. 작열하는 태양에 단 마음이 불면이라, 해풍으로 식히는 눈에 평온이 내려앉는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내려 잠으로 빠져들면 쪼개져 날카롭던 여름 햇살도 조금씩 둥글어져 갈 것이다. 대이작도의 여름은 천둥벌거숭이 아이처럼 거칠 것 없어도 줄 맞춰 질서를 잡아주었다. 올 여름 폭염도 이렇게 대이작도처럼 즐기는 사이에 잦아들 것이기에 그곳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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