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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구(경영학 박사, 인천시관광특별보좌관)
오는 12일부터 14일까지 송도 펜타포트 공원 일원에서는 올해로 11회째를 맞는 ‘인천 펜타포트 락(rock) 페스티벌‘이 열린다. 이 페스티벌은 2012년부터 5년 연속 문화관광체육부가 선정하는 유망축제로 선정 될 만큼 이젠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영국의 엔터테인먼트 전문 잡지인 ‘타임 아웃(Time Out)‘이 세계 최고의 뮤직 페스티벌 베스트 50으로 꼽는 등 국제적으로도 그 명성과 지위를 인정받고 있다.

인천의 성공으로 몇몇 아류 축제가 열리고는 있지만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은 선도자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사실 락 음악 깨나 듣는다는 마니아들은 인천이 한국 락 음악의 산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태동은 1980~90년대 인천의 각 고등학교에 한 두 개쯤은 있었던 스쿨 밴드(School Band)들로부터 시작했다. ‘심지’나 ‘별’같은 전문음악감상실에서 팝과 락음악에 심취해 있던 친구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순수 아마추어 밴드들이었다.

그들의 꿈은 단 하나, 지금은 헐려 공원으로 변한 인천시민회관(주안동 소재) 무대에 서는 것이었다. 주말이면 하루에 많게는 십 수어개의 아마추어 밴드들이 무대에 올라 기량을 뽐내곤 했다.

 ‘사하라’, ‘휘모리’ 같은 밴드들은 나름대로의 팬덤(fandom)을 거느릴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지금은 국내 락 음악계를 대표하는 스타로 성장한 김종서나 이승철도 풋풋한 10대를 이곳에서 지내며 내공을 길렀다. 당시 무대를 주름 잡던 무명의 락커(Rocker)들 중에는 속속 서울로 진출해 지금까지도 세션맨이나 엔지니어, 무대 연출가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락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락 음악은 자유와 도전, 그리고 젊음과 열정을 상징하는 음악이다. 때로 기존의 질서와 관행에 거칠게 저항하기도 하지만 락은 사랑을 추구하고 평화와 공존을 지향하는 음악이다. 그게 소위 락 스피릿(spirit, 정신)이다. 그런 락 스피릿의 세례를 흠뻑 받고 자란 인천의 아이들은 이제 반백의 기성세대가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모 세대가 일구어 놓은 근대화의 기틀 위에서 도전과 열정을 바쳐 오늘의 인천 창조에 일조했다. 인천은 그런 락 음악의 정신이 깊숙이 스며있는 도시다. 인천은 개항 이래 한시도 멈춘 적이 없었다.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했고 불가능에 도전해 왔다. 땅이 모자라면 바다를 메웠고, 길이 막히면 바다와 하늘에 세계로 향한 길을 열어 놓았다.

지금도 대한민국 대도시 중 유일하게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도시가 인천이다. 인구 300만 시대를 맞아도 그 성장과 발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런 눈부신 변화와 발전의 절반은 록 음악의 덕이라 말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아직도 어르신들 중에는 왜 하필이면 ‘록 음악 따위에 혈세를 쓰는가’하시면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분이 꽤 있다고 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들에게 락 음악은 그저 귀 따가운 소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치렁한 긴 머리와 꽉 끼는 가죽바지에 눈살은 절로 찌푸려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의 일부일 뿐이다. 그것의 정신, 열정, 기상 따위의 감추어진 진가까지 생각한다면 왜 인천에서 지자체가 직접 주최하는 국내 유일의 락 음악 축제가 열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1999년 그 해 여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빗줄기와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탕 속에서도 수만의 관중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당시 이미 멤버들의 나이가 50을 넘은 노장 밴드 ‘딥 퍼플(Deep Purple)’은 감전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온몸으로 비를 맞아가며 격정적으로 노래했다. ‘아무도 내 생각을 가져갈 수 없어, 신념을 훔쳐갈 수도 없지, 난 계속 달릴 거야, 나는 찬란하게 빛나는 고속도로의 별이야(’Highway Star‘의 가사를 일부 편집)’

 혹시 그날 밤 그들은 훗날 10여년 후 대한민국의 별이 될 인천의 미래를 미리 예견하고 축복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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