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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효성 <소설가/기호일보 독자위원>
애당초 화려함이나 역동의 기상은 물론이고 솔깃해서 빠져들게 할 언변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젊어 한때는 성격 센 언니가 부러워 카리스마 장착한 여성상이 희망사항이었던 적도 있었다.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처럼 밍밍해서 입맛을 단숨에 사로잡을 위인이 아니기에 있는 듯 없는 듯 티 나지 않게 살았다. 주장하는 쪽의 의견이 단호하면 마음속에는 반감이 생겨나도 대체로 따랐다. 가끔은 이건 아닌데 싶으면 결사반대와 날선 언쟁이 건강한 의견 수렴이 아니라 소모전이 분명하다고 자기 위안을 삼기도 했다.

 살아보니 선동이 다 나쁘지도 수긍이 만사형통도 아님을 경험한다. 적당한 견제와 적당한 물꼬트기를 배합해서 자극은 자극대로 순화는 순화대로 살리면서 적절하게 배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성정은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완전히 바뀌지는 않는 것 같다. 천성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나이도 먹고 주름의 골도 패인다. 욕구나 욕망 역시 버리지 못해 세월의 켜켜에 쟁여 넣어서 안고 간다. 원숙이 숙성으로 잘 익어 가면 더없이 아름답겠지만 사람이라서 어려운 과제다.

 뛰어난 재능이나 지식은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물리적으로 분명 도움이 된다. 그런데도 나이가 들어가니 뛰어난 재능이나 지식을 가진 사람보다는 따뜻한 사람이 좋다. 오랜 인연을 이어가는 사람은 잘나서 돋보이는 이가 아니라 편안해서 또 보고 싶은 사람이다. 요모조모 이유를 붙여서 따지지 않고 빠른 머리 회전으로 실익을 계산하지 않고 사소한 실수는 못 본 척 눈감아주고 대화의 주도권을 독점하지도 않는 사람이야말로 최고의 미덕을 지닌 인연이 아닐까 싶다.

 느려서 미덕이 된 행운을 나이 들면서 누린다. 왜?에 대한 답으로 ‘그냥’이 단골인 나를 답답해 한 적도 많았는데 나이 들어가니 속을 털어놓아도 뒤탈 걱정 없는 사람이라며 우대를 한다. 마음의 도시화에 마음의 전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덕분이다.

 그냥의 어원을 찾아보면 ‘그’와 ‘양(樣)’이 결합한 말이다. 그 양(樣)대로’, 즉 ‘그 모습대로’란 뜻에서 ‘그냥’이 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 모습 그대로’란 의미처럼 어떠한 작용을 가하지 않거나 상태의 변화 없이 있는 그대로란‘ 뜻이다.

 우리말은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 중에서 부사적 표현이 가장 풍부한 언어다. 부사는 감성의 결을 세세하게 표현하기 위해 발달한 표현법이다. 내 가슴이 네 가슴이 될 수 있도록 완벽한 감정이입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강하게든 약하게든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부사적 표현을 쓴다.

 ‘그냥’은 이런 부사의 역할을 두루뭉술하게 만드는 특이한 단어다. 채근하는 물음에 그냥이라고 답하는 사람은 무심한 듯, 체념한 듯, 어떤 상황이라도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 담겨있다.

 각박하고 날카롭고 분주해서 효율성이 우대 받는 세상에 뭉뚱그린 그냥은 쉬어갈 틈을 주는 말 같아서 좋다. 그냥 보고 싶었어, 그냥 같이 밥 먹고 싶었어, 그냥 전화하고 싶었어, 그냥 주고 싶었어, 그냥 떠나고 싶었어.

 그냥이 그냥 받아들어지고 그냥 내어 줘도 그냥 이해되는 인연이 소중하게 생각된다. 그래서 우리 말 중에 ‘그냥’이란 말이 참 마음에 든다. 그냥을 마음에 품어 그냥 그대로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은 이유다.

 한눈에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싫증나지 않고 어지럽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아서 난반사의 대척점으로 흘러가기를 바란다면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마음만은 그냥의 성정을 화장으로 꾸미지 않고 소박한 그대로 함께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밍밍해도 튀지 않아도 주도를 하지 못해도 있어줘서 편안한, 그대로 인정해준 인연들이 새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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