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지역 독립운동사적지가 푯말 하나 없어 옛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사진은 대형 마트 등이 들어선 가토정미소 동맹파업지와 주차장으로 변한 조선성냥공장 동맹파업지.   박온빛 인턴기자 ohvit@kihoilbo.co.kr
▲ 인천지역 독립운동사적지가 푯말 하나 없어 옛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사진은 대형 마트 등이 들어선 가토정미소 동맹파업지와 주차장으로 변한 조선성냥공장 동맹파업지. 박온빛 인턴기자 ohvit@kihoilbo.co.kr
인천지역 독립운동 사적지가 푯말은커녕 대부분이 상가건물·주차장으로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11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국내항일독립운동사적지 조사보고서’ 등에 따르면 일제에 항거했던 인천지역 내 ‘독립운동사적지’는 총 25곳이다. 이 중 원형으로 보존돼 있는 곳은 단 2곳뿐이다. 절반이 넘는 14곳은 건물 등으로 변형됐고, 나머지 9곳은 흔적조차 없이 멸실됐다.

강화군 양사면 철산리 산이포는 1908년 의병과 일본군 간의 전투로 의병 7명이 전사한 곳이다. 이후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40분부터 밤 12시까지 수백 명의 군중들이 양손에 등불과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곳은 현재 해병대 초소가 들어서 예전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중구 신생동 38 일대는 일제강점기 인천지역 노동운동의 시발점인 ‘가토정미소 동맹파업지’가 있던 곳이다. 1924년 11월 17일 인천 가토정미소 여성 노동자 400여 명이 일본인 감독관의 야만적 횡포와 민족적 차별에 대해 분노·항의하며 동맹파업을 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현재 대형 마트와 주거지가 들어섰다.

동구 금곡동 32(배다리삼거리)에도 ‘조선성냥공장 동맹파업지’의 터가 남아 있다. 일본인을 향한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 요구는 민족적 저항의식과 연계돼 조직적인 동맹파업으로 발전했다. 현재 이곳 또한 표지석 하나 설치되지 않은 채 건물과 주차장으로 방치됐다.

이 밖에 학생 200명이 일본인 교장의 민족 모욕과 차별에 항거해 동맹휴학을 전개했던 부천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지(현재 인천문학초등학교)를 비롯한 14곳 등 대부분의 사적지도 주변에 주택과 상가 등이 들어서 있는 실정이다.

온전한 독립운동사적지는 1919년 4월 1일 강화군 하점면민들이 횃불시위를 벌인 하점면 신봉리 산 63의 ‘봉천산 3·1운동 만세시위지’와 1907∼1908년 강화의병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강화의병전투지’(강화 전등사 사찰 경내) 2곳뿐이다.

인천보훈지청 관계자는 "독립운동사적지의 경우 푯말 설치 등 복원사업을 계획하고 있지만 토지소유주의 반대 등으로 사실상 관리하기 힘든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승훈 기자 hun@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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