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마을 청년들이 아침 일찍 일터로 가는 길에 물살이 빠른 여울목을 건너야 했다.
이때 강둑에 던져진 검은 돌을 하나씩 안고 가는 게 아닌가.
그 이유가 궁금했던 선교사들이 묻자 청년들은 체중을 늘려 물살을 이겨내기 위함이라고 답했다.
물살을 견디기 위해 체중을 늘려야 하는데, 마침 주변에 둥근 돌이 많아 잘 활용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청년들이 가슴에 안고 가는 돌은 그 사람의 체중에 반비례했다.
즉, 체중이 가벼운 청년은 무거운 돌을 들어야 하고, 체중이 좀 나가는 경우에는 가벼운 돌을 선택하는 것이다.
선교사들이 살펴본 결과 자신의 체중이 50kg 나가는 청년은 30kg 정도 나가는 돌을 선택하고, 60kg의 체중이라면 20kg의 돌을 안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대략 80kg의 무게를 확보하고 강을 건너는 셈이다.
흑인청년들이 강을 건널 때 검은 돌을 안고 가는 모습에서 인생사에 누구나 걱정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맞지 않는 상사를 만나기도 하고 불편한 부하 직원을 모시고(?) 일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평범해 보이지만 가정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 어려운 일을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저런 힘든 상황을 아프리카 흑인 청년들이 강을 건널 때 가슴에 안고 가는 검은 돌이라 생각하면 이 또한 극복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어려운 상사를 만나서 당장은 힘들어도 6개월 정도 잘 버티면서 과거 다른 직원들보다 상사에게 가까이 다가선다면 주변에서는 훌륭한 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하직원을 열심히 일하는 사원으로 ‘업 그레이드’시키면 훌륭한 상사, 멋진 조련사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유명한 동화 이야기를 해보자.
옛날 옛적 한 마을에 두 분의 혹뿌리 영감님이 사셨다.
어느 날 밤 한 분의 영감님은 멋진 노래 실력이 모두 혹에서 나온다고 해 도깨비가 이를 떼어갔고, 결과적으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성형을 완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찾아온 도깨비는 혹에서 노래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또 다른 혹뿌리 할아버지의 다른 얼굴에 떼어갔던 혹을 하나 더 붙였다.
이를 일러 ‘혹 떼러 갔다가 혹 하나 더 붙이고 왔다’라고 한다.
결국 직장에서든 가정에서이든 다소간 불편한 일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모든 것이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늙은 소의 목에 응결된 우황이 죽을 뻔 한 사람을 살린다는 ‘우황청심환’의 원료가 되듯, 삶의 고통스러운 일들이 오히려 그 생명을 지켜내는 원동력일 수 있다는 역발상을 해보는 건 어떨까?
흑인청년이 강을 건너면서 검은 돌이 무겁다거나 귀찮다고 생각하고 강물에 버리는 순간 청년의 몸은 강한 물살에 떠밀려 생명에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그 무엇을 도려내거나 버린다고 해서 그 순간 모든 고통과 아픔이 사라지진 않는다.
오히려 어설프게 영감님이 혹을 스스로 무리하게 떼어낼 경우 그 상처로 인해 더 큰 아픔과 고통을 겪게 되거나 이로 인해 죽을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검은 돌을 안고 강을 건너는데 익숙한 흑인마을 청년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겪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슬기롭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면서 희망찬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
소나무가 태어난 자리에 불평하지 않고 몸을 구부리며 적응하는 것처럼, 여우가 죽을 때 ‘고향쪽 하늘을 바라본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심정으로 지금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바라보았으면 한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