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희 수필가.jpg
▲ 김순희 수필가
어둠 속에서 어둠을 봤다. 암흑이었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면 이러했을 거라 가늠해 본다. 100분의 어둠 여행이 끝날 때쯤 가슴에 차오른 건, 진부하게도 사랑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윗집을 방문해야겠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무엇인가를 준비해서 간다면 더 괜찮으리라. 비록 진부할지라도 표현할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사랑이므로.

 체험 프로그램 ‘어둠 속의 대화(DIALOGUE IN THE DARK)’는 제목대로 어둠 속에서 진행된다. 눈을 떠도 감아도 보이는 건 어둠뿐이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상상할 수 없는 완전한 어둠이었다. 캄캄한 블랙에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지난해 관람했던 마크 로스코의 색채그림 ‘블랙’은 포근하게 영혼을 어루만지고 다독여 줬다. 그에 반해, 체험에서 마주한 입체적인 블랙은, 몸은 물론 영혼까지도 깡그리 빨아들일 듯한 두려움이었다. 그래서인지 로드마스터(길 안내인)의 목소리가 들렸을 땐, 마치 한 줌 빛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따라 벽을 짚으며 이동했다.

 오감 중에 중심 감각인 시각이 차단됐으므로 손끝에 감각을 집중시켜야 했다.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만져보면서 사물 이름을 맞춰보려 했지만 번번이 빗나갔다. 시각의 역할은 보는 것을 넘어 다른 감각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시각이 제거된 상태였기에 여타의 감각이 생각 이상으로 섬세해졌는데 그 중에서도 청각 반응은 놀랄 지경이었다. 로드마스터의 설명이 무색하게 바닷가와 계곡의 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흐르는 시냇물과 튀는 물방울의 차이도 느껴졌다. 옆 사람의 숨소리와 손바닥 비비는 소리, 침 넘기는 소리까지 고주파로 감겼다. 심지어 연인끼리 주고받는 속살거림도 여과 없이 들렸다. 그 모든 소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과 안정을 주며 두려움을 가라앉혔다. 누군가가 습관적으로 킁킁대는 콧소리와 칙칙 신발 끄는 잡음조차도 어둠속에서는 정겨웠다.

 윗집이 이사 온 후 층간소음이 심해졌다. 막대기로 바닥을 치는 것 같았고, 탱탱볼을 튕기는 것 같았고, 쌓은 블록을 와르르 부수는 것 같았다. 소리로 봤을 때 어린 아이의 존재를 헤아릴 수 있었다. 나 역시 육아 시기가 있었고, 또한 그 고충을 이해하기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점차 스트레스가 쌓였다. 특히 묵직하면서도 간헐적으로 턱 턱 울리는 소리는 불면으로 힘든 내 상황을 극도로 예민하게 했다. 관리실에 중재 요청을 할까, 인사 차 방문해 말을 해볼까, 고민에 휩싸였다. 잘못했다간 이웃 간에 자칫 분쟁이 생기거나 교양 없는 사람으로 비칠까 전전긍긍하던 중 소음의 정체를 알게 됐다.

 일층에서 승강기를 탈 때였다. 함께 타는 사람이 우리 집 층수 위층 숫자를 누르기에 혹시, 했더니 윗집 사람이라며 인사를 건넸다. 옆에는 열 살 남짓한 남자 아이가 엄마의 팔을 잡고 기우뚱 서 있었다. 소음의 원인을 마주했다. 아이의 한쪽 다리에 교정기가 채워져 있었다. 한창 뛰어다닐 아이가 저러고 있으니 얼마나 갑갑할까.

 세상살이에 서투른 성격 탓에 유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소리들이 많았다. 지칠 줄 모르고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나도 따라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늦은 밤까지 놀이터를 집 삼은 아이들의 왁작거림을 막느라 무더위에도 창문을 열지 못했다. 신경을 건드리는 소음이 한순간에 음소거가 되기를 바라며 머리를 감싸곤 했다. 힘겹게 서 있는 아이를 보며 곤두섰던 그동안의 감정을 삭였다.

 ‘어둠 속의 대화’는 세상이 내는 다양한 소리를 존중할 줄 모르던 마음폭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줬다. 그러고 보면 소중한 것들은 눈을 감았을 때 오히려 깊이 새겨지는 법이다.

 심금을 휘젓는 노래를 감상하다가, 역경을 딛고 성공한 인생 스토리를 듣다가, 그리운 아버지 모습을 떠올리다가, 고즈넉한 풍경을 보다가 문득 눈을 감게 된다. 그처럼 시각의 의존에서 벗어났던 100분은 삶이 만들어 내는 일상 소음들과 포옹하게 해준 시간이었다. 너그럽고 완벽한 어둠과의 조우. 눈 감으면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