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당길의 가을 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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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길의 가을 초희
신효성 소설가/기호일보 독자위원
  • 기호일보
  • 승인 2016.10.05
  •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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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효성 소설가
붉은 빛이 도는 소나무 숲에서 바라본 초당의 가을 하늘은 청명했다. 에메랄드 빛 하늘은 상쾌해 마음속 묵은 먼지까지 날려버린다. 행글라이더로 하늘을 날고 있는 사람들을 눈으로 쫓아가는 사이에 내 몸도 떠오를 것만 같았다. 여태껏 구속하는 물리적 힘이 없음에도, 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길들여짐이 스스로를 옥죈다.

 선한 독립이라고 격려를 하지만 그 단초는 예외 없이 용기인 것 같다. 오늘은 좀 파격이고 싶다. 초희는 시인이라 400여 년 전 허초희가 돼 절정을 향해가는 가을 속으로 첨벙첨벙 걸어갈 것이고, 그럼 나는 커피 향 흐르는 강릉 바다로 뛰어들어야 하나? 어중간한 문학성을 분위기로 만회해 보려고 백사장을 걸으며 모래 위에 편지를 써 본다. 카페거리는 축제로 들썩이고 있어서 커피 볶는 향이 가을 바다에 자욱하다. 바다에서 가을을 느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호기심이 생긴다.

 해송 늘어선 소나무 곧은 초당에는 허균·허난설헌의 유적공원이 있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 집안인 허균과 허난설헌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어서 소나무 숲 산책로를 따라 생가도 보고 기념관도 보고 시비도 봤다. 본명인 초희보다 호 난설헌으로 더 잘 알려진 그녀는 이곳에서 태어나 타고난 시성과 천재성으로 오히려 불행해졌다.

 하필이면 이 좁은 조선 땅에, 그것도 여자로 태어나, 하고많은 남정네 중에서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지. 초희의 독백이 들리는 것 같다. 여자에게 관대하지 못한 시대에 부덕한 지아비를 만났고, 일찍 세상 뜬 어린 자식은 혼절할 슬픔덩어리로 가슴을 누르고, 고부간 갈등은 시가에서 외톨이일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 아버지의 죽음을 시작으로 오라버니와 동생까지 몰락하니 섬세한 그녀의 감성에 멍이 들 수밖에 없다. 그녀를 잡아줄 지주가 없어진 세상은 깎아지른 벼랑이 돼 꽃다운 나이에 낙화하게 만들었다.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지듯이 27세의 나이로 생을 내린 그녀의 시는 동생 허균이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게 주면서 「허난설헌집」으로 출간돼 중국 문인들이 애송하게 됐다. 이것이 18세기에 동래에 무역상으로 온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 일본에서 출간돼 큰 사랑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동양 삼국에서 가장 뛰어난 여류문인으로 자리매김 됐다.

 돌아 나오는 길 어귀에서 감 따는 할머니가 우릴 보더니 갈라진 장대 끝으로 감 가지를 꺾어주신다. 까악! 숨넘어가는 찬사에 할머니가 웃으신다. 적잖은 나이의 여인네들이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이자 재미있으셨나 보다. 곱게 익은 선홍빛 감은 반들반들 윤이 난다. 잘 다듬은 시 한 수가 되어 가슴에 들어앉는다. 초희는 시를 쓰고 나는 소설을 쓴다. 어린아이의 잠투정처럼 나는 소설 쓰기에 편하게 몰입할 수 없어 늘 투정이다. 시인 초희가 부럽다. 그러면 허초희가 아닌 현실의 김초희 시인은 내게 눈을 흘긴다. 붉게 잘 익은 감처럼 절정의 작품이 반들반들 만들어지면, 나는 원고를 들고 이곳으로 달려오겠다. 혼자도 좋고 초희 시인과 함께라도 좋다. 허초희도 불러내고 허균도 불러내어 하늘 곧게 자란 소나무 숲에서, 붉은 소나무 껍질처럼 탱탱한 작품을 낭송하고 싶다. 시문(詩文)을 지으며 눈과 귀와 심장으로 보고 듣고 느낌을 향유하는 관계가 가치로 존중받는 시대는 더 전전의 시대였다.

 지금 우리는, 난전에 펼쳐놓은 조잡한 물건처럼 시인도 작가도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초희의 정신영역은 우리가 사는 보통 세상에서 가끔 위안은 돼도 생활의 달인으로는 인기가 없다. 가장자리로 밀쳐진 현실에 초희는 외로운 고립으로 상처를 받은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초희의 문선이 부럽고 치열한 감성이 존경스럽다. 초희와 삶을 바꾸어서라도 그녀의 높은 작가적 재능을 가져보고 싶다. 문학기행으로 오고 가족 여행으로 오고 친구와 오고, 수없이 찾아온 강릉이다. 계절에 따라 세월에 따라 동행인은 바뀌어도 교집합은 하나, 늘 긴장감 도는 낭만이다. 나에게 강릉은, 레오파드 무늬의 스카프를 두른 도도와 살짝 일탈의 자유를 맛보는 긴장이 버무려진 일품요리다. 강릉 여행, 함께하는 동감의 가슴도 탱탱하게 부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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