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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
국어사전에서는 ‘지성인’이란 말을 ‘사물을 개념에 의해 사고하거나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판정하는 오성적(悟性的) 능력이나 그러한 정신의 기능, 즉 지성을 가진 사람’ 이라고 설명한다.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엔 ‘지성인’이란 말이 자주 쓰였는데, 요즘에는 별로 쓰이지 않는 것 같다. 대학을 ‘지성의 전당’이라 불렀고, 대학의 입학식사(入學式辭)에서는 ‘지성인이 되라’는 당부가 빠지지 않았다. 혹여 대학생이 술에 취해 밤길에 비틀거리면, 지나는 어르신이 "지성인이 그러면 되나?" 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개인별로 차이가 있긴 했지만) 대학생 본인도 지성인이라는 자존감과 함께 가족·사회·국가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면서 풍부한 지식과 올바른 역사 의식을 습득하기 위해 나름 고뇌하고 노력했다.

 어떤 대학생들은 방학 중에 농촌 봉사활동을 가서 농민들의 일손을 도우면서 어떻게 하면 농업·농촌이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 밤새 토론을 벌였다. 또 어떤 대학생들은 도시의 공원(工員)들에게 야학(夜學)을 함으로써 가난 때문에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의 주린 학습 욕구를 채워줬다. 또 어떤 대학생들은 학생 신분을 감추고 공장에 위장취업해 근로자들과 함께 동고(同苦)하면서 노동법을 가르치고 인간의 존엄성과 근로자의 권리의식을 일깨웠다. 또 어떤 대학생들은 정보기관과 경찰의 감시의 눈을 피해 체포·구속의 위험을 무릅쓰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당시의 모든 대학생들이 이러한 노력·봉사·희생에 적극 동참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든 대학생들의 이런 ‘계몽활동’은 ‘배워서 남 주자’는 지성인으로서의 책임의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각한 취업 경쟁하에서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는 요즘 대학생들에게 ‘지성인’과 ‘계몽’에 대해 얘기하면 너무 사치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청춘시절의 ‘낭만’과 ‘열정’은 소중하다는 점, 특히 ‘진리’와 ‘정의’를 향한 ‘스튜던트 파워(Student Power)’는 역사 발전의 동력이라는 점을 얘기해 주고 싶다. 1987년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구호 아래 시민들의 전폭적 참여로 이뤄낸 ‘6월 민주항쟁’도 60·70년대 이후 대학생들의 꾸준한 ‘계몽활동’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계몽철학자인 칸트(Immanuel Kant ; 1724~1804)의 묘비에는 "내 위에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 있고, 내 안에는 도덕의 법칙이 있다"라는 구절이 쓰여 있다고 한다. 그는 "인간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타인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서도) 단순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고 항상 ‘목적’으로서 존중돼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내면에는 그의 존엄성(인격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고, "법이란 한 사람의 자의(恣意)가 다른 사람의 자의와 자유의 일반원칙에 따라 결합할 수 있는 조건들의 총체"라고 정의했다.

또한 "계몽이란 인간이 자신에게 책임 있는 미성숙(未成熟)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오성(悟性)을 활용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말한다. 이 무능함의 원인이 오성의 결핍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오성을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 있다면, 그 미성숙의 책임은 바로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계몽의 구호(口號)는 다음과 같다. 자신의 오성을 스스로 활용할 용기를 지녀라!"라고 하면서, "우리는 지금 계몽된 시대에 살고 있는가?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계몽이 진행 중인 시대에 살고 있다(Leben wir jetzt in einem aufgeklaerten Zeitalter? So ist die Antwort ; Nein, aber wohl in einem Zeitalter der Aufklaerung.)"라고 자문자답했다. 바야흐로 독서와 명상하기 좋은 계절인 가을을 맞아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지금 계몽된 시대에 살고 있는가?" 최근 청년들의 연이은 자살, 집권여당 대표의 무모한 단식 등 극단적 선택이 횡행하는 모습을 접하면서 우리 사회의 ‘계몽’이 앞으로 진전되기보다 오히려 자꾸만 뒤로 후퇴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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