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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어느 흑인 청년이 짐을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가다가 언덕 앞에 섰습니다. 청년은 혼자서 무거운 수레를 끌고 언덕을 올라가려니 엄두가 나질 않았던 겁니다. 주위를 돌아보니까 마침 지나가는 행인들이 꽤 보입니다. 청년은 ‘누군가 내게 도움을 줄 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기다렸지만, 어느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청년은 ‘만약 내가 백인이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러 왔을 거야. 내가 흑인이라서 나를 무시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좌절감도 들었습니다. 할 수 없이 혼자 수레를 끌고 올라갔습니다.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올라가니 숨도 차고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어느 순간부터 수레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끌어올리기가 훨씬 수월해졌기 때문입니다. 청년이 뒤를 돌아보니 백인 청년들 몇 명이 수레를 뒤에서 밀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그때 알았습니다. ‘도와주세요!’라고 요청하기 전에 먼저 실행부터 해야 한다는 점을 말입니다. 이 청년이 훗날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평생을 바친 마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4년 전 어느 신문에 ‘가난한 과학영재의 집념, 미국을 감동시키다’란 제목의 글이 실렸습니다. 기사의 주인공은 노숙인 쉼터에 살던 17세 소녀였습니다. 소녀는 뉴욕시가 자신의 가족을 위해 임대주택을 마련해줬다는 소식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사연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감동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소녀의 가족은 집세를 내지 못해 살던 집에서 쫓겨나 노숙인 쉼터에 들어갔습니다. 생물학자가 꿈인 소녀는 노숙인 쉼터를 전전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나 봅니다. 소녀는 ‘인텔 과학경진대회’에 2년 전부터 롱아일랜드 해안가에서 열심히 연구한 ‘게의 공격이 홍합에 미치는 영향’이란 논문을 제출했었습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경진대회에서 준결승에 진출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소녀의 사연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각계에서 도움의 손길이 밀려들었습니다. 뉴욕시는 임대주택을 제공하기로 하고, 어느 대형호텔은 임대주택에 들여놓을 가구 일체를 제공하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소녀에게 장학금을 주겠다는 독지가들도 여러 명이 나타났습니다.

 사실 ‘가비’라는 이름의 이 소녀는 쉼터에 살면서도 남동생과 여동생을 챙기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가비 양의 어머니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일을 할 수가 없었고, 택시운전을 하는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청년 마틴 루터 킹의 사례나 17세 소녀 가비 양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행동을 하기 전에 주위 사람들에게 "여러분, 제가 수레를 끌고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데, 도와주실래요?"라든지, "여러분, 저에게 학비와 집을 마련해주시면 저는 위대한 생물학자가 될 수 있습니다"라고 외치기만 했다면, 과연 그런 도움들을 받을 수 있었을까를 말입니다.

 세상이 변해야 한다며 원망과 울분을 토해내면 잠시 동안은 속이 시원할 겁니다. 어떤 역경이라도 그 역경의 원인을 ‘너’의 탓으로 돌리면 잠시 동안은 위로받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혼란의 늪으로 빠져들고 절망감만 커질 뿐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을 ‘나’에게 두고,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 실행하는 것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오히려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요즘 나라가 무척이나 힘듭니다. 이 문제 역시 관련 당사자들이 문제를 피하기 위해 문제의 근원을 ‘네 탓’ ‘세상 탓’을 하며 온갖 꼼수를 두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성공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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