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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누구나 잘못은 할 수 있습니다. 교만함이 잘못의 원인 중 하나이겠지요. 교만은 ‘내’ 기준과 판단만이 ‘옳다’는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나타나곤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보다 더 큰 존재를 만났을 때, 그래서 자신의 기준과 판단이 그릇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수치심과 열등감을 느낍니다. 이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의 수준이 결정됩니다.

 개울이 강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이 최고인 줄 알고 살았겠지만, 강을 만나고 바다를 만나면 이내 머리를 숙이고 그동안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신의 교만했음을 반성하고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태도일 것입니다.

 한때 ‘이산’이라는 드라마가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의 정국은 무척이나 불안한 시절에 정조를 도와 정권을 잡게 한 일등공신이 바로 홍국영이었습니다. 정조를 등에 업고 홍국영은 내무, 총무, 재무, 병무, 외무, 학무 등에서 막강한 힘을 휘둘렀습니다. 관료들은 홍국영의 눈치를 봐야만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권력의 맛에 취한 홍국영은 오만방자한 삶을 살았습니다. 늘 술판을 벌여 세를 과시하고, 궁중 의녀를 첩으로 들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홍국영의 이러한 권력의 남용에 제동을 거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그에게 감히 그럴 수가 없었을 겁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홍국영의 탐욕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습니다. 정조의 정비인 효명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자신의 13살 된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밀어 넣어 후손을 보려고 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누이동생은 죽고 말았습니다. 이 죽음을 왕후의 짓으로 의심을 한 홍국영은 중전을 축출하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영광은 서서히 몰락의 길로 바뀝니다. 끝없는 탐욕이 준 당연한 결과일 겁니다.

 역사는 냉정히 그의 비행을 낱낱이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역적으로 몰려 귀양을 가게 됐고, 그로부터 2년 후 귀양지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홍국영의 호가호위하던 교만한 삶의 시작과 끝을 확인하기까지는 겨우 4년이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역사책을 덮을 수는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홍국영을 비롯해 왕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탐욕을 채워나가던 수많은 실세들 때문에 수많은 백성들은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행동을 유발시키려면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기쁨’은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기쁠 때는 환호를 보내고 파안대소를 하는 등의 행동을 합니다. ‘분노’도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주먹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장 품격 있는 에너지는 분노에너지를 놀이의 행위로 바꾸어내는 에너지입니다. 지난 주말, 백만 명 이상의 국민들이 모인 촛불집회에서 보인 모습이야말로 가장 품격 있는 에너지의 분출 사례로 한 치의 부족함도 없었습니다. 노래가 있고 춤이 있고,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역사의 현장에 나선 부모들의 밝은 모습들, 몇몇의 거친 행동에 ‘평화!’ ‘질서!’를 외치는 시민들의 모습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집회가 끝나자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까지 나서서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에서, 그리고 배신감과 절망감을 축제로 승화시키는 모습에서 이 나라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자신보다 더 큰 존재를 만났을 때가 바로 자신의 교만함을 내려놓아야 할 때입니다. 개울에서 자신들이 최고라고 여기며 공사를 구분하지 못했던 자들이 이제는 국민들의 거룩한 분노라는 바다와 같은 존재를 만났습니다. 이제, 꼬리를 내리고 계단을 내려와야 합니다. ‘이게 나라냐?’는 구호가 아직은 넘쳐나겠지만, 조금만 지나면 잘못된 길로 가던 역사의 물줄기를 올바른 길로 바꾼 뒤에, 다시 광화문에 모여 우리 모두는 ‘이게 바로 우리다!’라면서 얼싸안고 축배를 들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분노가 주는 선물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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