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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건태 경제부장

판도라의 상자에는 슬픔과 질병, 가난과 전쟁 같은 온갖 재앙이 담겼다. 그리고 제우스는 인류 최초의 여성 판도라로 하여금 그것들을 세상에 풀어놓게 했다. 놀란 판도라가 뒤늦게 후회하고 상자의 뚜껑을 닫았지만 그 안에는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희망’이 남았다. 흔히 인용되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일화다. 단군 이래 최대 게이트 사건의 피의자가 된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에서 판도라를 떠올리는 건 단지 그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역시 1960~70년대 고속성장을 가져다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든 재앙의 씨앗일 거란 생각에서다. 그가 갖고 있던 판도라의 상자에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추악한 것들만 가득 차 있었으니 말이다.

 오는 9일 국회 표결에 부쳐진 대통령 박근혜 탄핵소추안에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 담긴 재앙과도 같은 각종 범죄와 국정을 유린한 흔적들이 빼곡하게 나열됐다. 그리고 광장의 촛불은 그를 단죄하라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뭐지, 이 억지스러운 결말은. 박 대통령의 존재 자체가 판도라와 같은 재앙이라 여기면서도 그 뒤에 남겨진 희망을 찾고자 하는 이 모순된 현실 말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을 넘기면 또 새해가 밝아 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새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새로움에서 희망을 찾는 것은 어쩜 당연지사, 인지상정일지 모른다.

 신문도 예외는 아니다. 새해 첫날 지면 아이템과 새해 계획 수립을 위해 짬짬이 현장 기자들을 불러놓고 회의를 한다. 당연 회의 주제는 새해 어떻게 독자들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을 것이냐다. 쉽지 않은 논제다. ‘불확실성의 시대’ 한 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무엇을 근거로 희망을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각종 경제지표와 기관 전망을 보면 내년 우리나라 경제는 ‘생산·투자·소비’의 트리플 부진에다 국내 ‘정치리스크’까지 더해져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우리에게 희망이 남지 않았느냐는 헛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정치적인 구호에 지나지 않다. ‘창조경제’니 ‘통일대박’하며 임기 초반 국민들에게 잔뜩 희망을 불어넣던 박근혜 대통령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우리에게 현실 필요한 것은 희망보다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그에 상응하는 행운이다. 어설프게 희망만을 얘기하는 건 또다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재앙을 불러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신화의 일화가 주는 교훈은 단지 인간의 호기심과 욕심이 세상을 불행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려는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이 판도라의 상자 가장 밑바닥에 ‘희망’을 남겨 둔 것은 아마도 쉽게 뚜껑을 열어 그것을 꺼내 볼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을지 모른다.

 희망은 결코 새해 아침 쉽게 접하는 의례적인 인사말이 아니다. 희망만으로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차례 경험을 통해 습득했다. 현실에서의 희망이 불확실한 미래를 좀 더 포장해 보여 줄 수 있는 환각제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지금과 같은 불행한 현실을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한다. 이처럼 어려운 명제를 정의하기 위해 고서를 뒤지고, 명사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하지만 답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자주 가는 동네 치킨집 주인 아저씨, 그리고 사무실 근처에서 붕어빵을 굽는 아주머니, 건설 현장의 잡부가 말하는 희망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족 건강과 돈을 조금 더 버는 정도다. 희망이라기보다 그저 소망에 가까운 막연한 바람이다. 대통령 탄핵 이후 있을 정계 개편과 국정 공백에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촛불집회에 참여한 대다수 시민들은 비정상적인 국가시스템을 꼬집었고, 어린 학생들은 차별받는 세상에 대한 허탈감과 분노를 토로했다. 이들에게 희망은 거창한 장밋빛 청사진도 난세를 바로잡을 걸출한 영웅도 아니다. 그들 자신이다. 더 이상 누군가의 말을 믿고 밝은 내일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자괴감에 빠지지도 않고 답답한 현실에 부딪혀 치열하게 싸울 것이다.

 봉건왕조도 ‘민심은 천심’이라 믿었다. 공화정에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시장경제에서 손님은 왕이다. 누구든 새 지도자를 꿈꾼다면 쉽게 희망을 얘기할 게 아니라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변화는 머리로 바라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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