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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법학 박사
최근 국민들의 헌법에 대한 관심과 지식 수준이 놀랍도록 높아졌다. 초등학교 학생들조차 헌법 제1조의 내용(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을 줄줄 외울 정도이다. 방송인 김제동 씨는 광화문 집회에서 대통령이 헌법을 위반했다고 조목조목 따지며 헌법 제1조부터 제30조까지 줄줄 외워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지난 2일 야3당의 주도로 발의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에는 헌법위반 사실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즉, 국가의 권력과 정책을 최순실 등의 ‘사익추구의 도구’로 전락하게 함으로써, 주권자의 의사에 반해 국민주권주의(제1조) 및 대의민주주의(제67조 제1항)의 본질을 훼손했다는 점, 국정을 최순실 등의 비선조직에 따른 인치주의(人治主義)로 행함으로써 법치국가 원칙을 파괴하고, 국무회의에 관한 규정(제88조, 제89조)을 위반하고 대통령의 헌법수호 및 헌법준수의무(제66조 제2항, 제69조)를 정면으로 위반했다는 점,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장관(차은택의 대학원 지도교수) 등의 임명과 관련해서는 공무원 임면권(제78조) 남용, 이를 통해 각종 이권과 특혜 방조·조장과 관련해 평등원칙(제11조)을 위배했다는 점 등을 적시했다. 또한 사기업에게 금품 출연을 강요해 뇌물을 수수, 사기업의 임원 인사에 간섭 등 기업의 재산권(제23조 제1항)과 개인의 직업 선택의 자유(제15조)를 침해하고, 국가의 기본적 인권의 보장의무(제10조)를 저버리고, 시장경제질서(제119조 제1항)를 훼손했다고 봤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국가재난 상황에서 박 대통령의 대응은 사실상 직무 유기에 가깝고 이는 생명권 보호의무(제10조)를 위배했다고 했다.

 헌법이 ‘살아있는 법(lebendes Recht)’으로서 기능하게 되고 이에 따라 국민들의 헌법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커지게 된 배경에는 ‘헌법재판소의 존재’가 있다. 사실 군사정부 시절에 우리나라의 헌법은 ‘장식헌법’에 지나지 않다는 비판이 컸었다. 왜냐하면 헌법의 규범력을 실현할 수 있는 재판기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87년 헌법 개정으로 헌법재판소제도가 도입되면서 헌법은 국민들의 생활에 직접적이며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생활헌법’이 됐다. 헌법재판소제도의 도입을 1987년 헌법 개정의 백미(白眉)라고 일컫는 이유이다.

 대통령 탄핵안이 내일 국회에서 가결되면 향후 국민적 관심은 온통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에 쏠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 국민들 사이에 "헌법재판소, 믿을 수 있나"라는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2014년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해산된 옛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당시 통진당의 해산이 박근혜 정권의 계획 하에 이뤄졌다고 주장하며 그 배후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목하고 있어서다. 김영한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비망록에는 2014년 12월 17일에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을 뜻하는 ‘장’(長)이란 글자 아래 ‘정당 해산 확정, 비례대표 의원직 상실’ 등의 메모가 적혀 있다. 그런데, 헌재는 이날 오전 11시40분께 선고 기일을 공개했고, 이틀 뒤인 12월 19일 재판관 8대1의 의견으로 통진당 해산을 결정했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고려하면 청와대와 헌법재판소 간에 통진당 해산에 관해 사전 조율한 정황이 분명해 보인다. 검사 선후배 사이인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이 직접 이 문제에 대한 국민적 의혹을 해명해야만 한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심판을 공정한 심판기관으로서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통진당 해산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국민적 불신을 깨끗이 씻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통진당 해산 외에도 박근혜 정부하에서 벌어진 많은 일들(전교조 탄압, 산케이신문 검찰 수사, 언론의 자유와 사법권의 독립성 침해 등)의 배후인물로 지목되고 있지 않은가. 최근의 탄핵정국 상황을 언론에서는 ‘전현직 검사들의 결투’, ‘창과 방패의 대결’로 표현하고 있다. 자칫 우리 사회가 총체적인 ‘모순(矛盾)의 수렁’에 빠지거나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장(場)’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특히 헌법재판소가 오물을 뒤집어쓰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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