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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겸손의 반대말은 교만일 겁니다. 교만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나곤 합니다. 나 아니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니까요. 사실 속이 꽉 차 있는 사람들은 굳이 자신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요즘 세상일을 보면 무척이나 교만한 사람들이 우리 위에서 군림하고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보검과 망나니 칼은 모두 칼입니다. 그러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보검은 칼집이 있지만, 망나니 칼은 칼집이 없습니다. 칼날이 무척 예리해서 두려움을 주기 때문에 보검은 칼집에 넣어 보관합니다. 그러나 망나니 칼은 칼집에 넣어둘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늘 두려움을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을 우리의 ‘재능’이라면, 칼집은 그 재능을 세상에 드러내는 ‘인격’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보검이 사람을 ‘살리는’ 칼이라면, 망나니 칼은 ‘죽이는’ 칼입니다. 그래서 망나니 칼은 인격이라는 칼집이 필요 없습니다.

 옛날에는 정육점을 푸줏간이라고 했습니다. 푸줏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천대를 받던 시절이었지요. 어느 날 양반이 푸줏간에 들렀습니다. "여봐라, 소고기 한 근만 다오."

 푸줏간 박 서방이 고기 한 근을 썰어 주었습니다. 이때 다른 양반이 들어와 "박 서방! 소고기 한 근만 주시게"라고 하니까, 박 서방은 먼저 온 양반에게 준 고기보다 훨씬 더 많이 썰어 주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양반은 당연히 물었겠지요. "이봐, 똑같은 한 근인데, 저 양반 고기는 내 것보다 왜 더 크냐?"

 그랬더니 박 서방의 대답이 참으로 걸작입니다. "아, 그거요? 아까 것은 ‘여봐라’가 자른 고기이고, 이것은 ‘박 서방’이 자른 고기입니다."

 세상을 교만한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사람들은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다른 사람은 나의 성취를 위한 도구로 여긴다는 말일 겁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은 상대방을 높이는 것이라서 상대방은 큰 자긍심을 느끼게 해줍니다.

 어느 분의 글에 보면, 맛있는 김치가 되려면 배추가 다섯 번은 죽어야 한다고 하네요. ‘뽑힐 때, 잘릴 때, 절일 때, 버무릴 때, 그리고 씹힐 때’라고 합니다. 호수가 아름다운 이유는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서겠지요. 그러니 모든 물이 그리로 모이게 되겠지요. 겸손이 주는 위대함일 겁니다. 뻣뻣한 배추만으로 교만하게 살았던 권력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 때문에 나라가 혼란스럽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도종환 선생의 ‘가죽나무’란 시를 함께 음미하고 싶군요.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 내 딴에는 곧게 자란다고 생각했지만 /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 꼬여 있는 걸 안다. /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 다만 보잘 것 없는 꽃이 피어도 /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 / 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 /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 걸 /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 하늘 한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뿐이다. /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 하나라도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 기꺼이 팔 한 짝을 잘라 줄 마음자세는 언제나 가지고 산다. / 부족한 내게 그것도 기쁨이겠기 때문이다."

 190만 명이 모인 촛불집회를 폭력과 파괴 없이 아름답게 치러낼 정도로 품격 있는 국민들! 이 국민들이 시인이 말하는 겸손한 ‘가죽나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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