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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평생교육원장
1915년 9월 11일부터 50일간 조선총독부 주최로 ‘시정 5주년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렸다. 일제의 조선 강점을 미화하고 저들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인 관제행사였다. 주행사장은 경복궁이었지만, 외부에도 별관이라는 이름으로 박람회장이 만들어졌다. 매일신보사 사옥에서는 가정박람회가 열렸고 인천 사동 일대에도 조선물산공진회 별관으로 인천수족관이 개설됐다.

설계는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資平)가 맡았다. 당시 유행하던 세제션 양식의 본관이 357㎡ 규모로 세워졌고, 부대시설을 포함한 전체면적은 1만4천여㎡ 정도였다. 이곳에는 악어를 비롯한 각종 어족자원은 물론 독도의 강치와 인천 앞바다에서 어부의 그물에 걸렸던 고래도 전시됐다.

인천수족관은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시설이었지만, 눈을 홀릴 만한 구경거리였다. 50일간의 유료관람객이 9만8천 명에 달했다. 1925년 인천 인구가 5만6천295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인원이 관람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일은 1907년 무렵에도 지금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일대에 수족관 건설이 추진됐다는 사실이다.

근대 개항기 우리나라로 유입된 많은 근대문물이 그러하듯 인천수족관도 제국주의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인천은 해양박물관의 핵심시설인 수족관(아쿠아리움)이 시작된 도시이다. 그러나 수족관이 세워진 지 1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인천에는 수족관이 없다.

1923년에 열린 부업공진회를 기념해 인천상업회의소가 인천수족관 설치를 추진한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를 필두로 잊을 만하면 수족관 설치 계획이 발표됐지만 건설로 이어지지 못했다. 심지어는 봄에 기공식을 한 아쿠아리움 건설 계획이 그해 겨울에 취소되는 일도 있었다.

얼마 전 인천시는 제2국립해양박물관 인천 설립 가능성을 발표했다. 또한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이 수행한 연구용역결과를 근거로 해양수산부에 국립해양박물관 건립을 건의할 예정이라 한다. 부산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국립해양박물관이 인천에 세워진다니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도 지울 수 없다. 인천에는 유독 국립기관이 적고, 인천에 있던 기관마저 없어지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수차례 봐왔기 때문이다.

인천은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 이상이 거주하는 수도권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가장 발달한 임해도시이나 해양도시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인천에는 바다가 없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릴 정도로 인천시민과 바다 사이에 존재하는 마음의 거리는 멀기만 하다. 인천이 바다와 멀어진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수도권을 위해 인천 바다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인천은 개항 이래 멋진 해안선을 포기하고 항구를 만들어 수도권에서 생산되거나 필요로 하는 물품이 인천항을 통해 들고나도록 도왔다. 70, 80년대 공업화시대에는 바다를 메워 산업단지로 내주었고, 90년대에 들어서는 인천의 다도해를 메워 만든 땅에 수도권 쓰레기매립장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립기관이나 시설은 늘 인천을 도외시해 왔다. 2014년에는 인천에 있던 해양경찰청이 없어지는 아픔까지 겪어야 했다.

인천시민은 인천항을 비롯해 바다와 관련된 영역에서 특히 지역 홀대가 심하다고 느끼고 있다. 인천시는 유정복 시장이 해양주권선언을 통해 발표한 국립해양박물관 건립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지역정치권도 정파를 떠나 국립해양박물관 건립을 도와야 한다. 인천항만공사도 예외일 수 없다. 국립해양박물관의 인천 건립은 인천이 해양도시로 거듭나기 위한 첫걸음이다.

인천이 웅비했던 시기는 바다를 통해 세계와 연결됐던 때이다. 인천이 국립해양박물관 유치를 계기로 명실상부한 해양도시로 거듭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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