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이 1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신년간담회를 열고 정유년 올해에는 경제를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제5공화국 시절 자신이 임명한 보좌관들 덕분에 나라 경제가 좋아졌다고 은연 중에 강조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언급한 제5공화국 보좌관 중에 사공일 전 재무부 장관도 유명세를 치렀지만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 활약한 김재익 수석은 우리나라 경제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비운의 천재'로 회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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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기획재정부 제공
고 김재익 수석은 1938년 서울 생으로 서울대 정치학과 외교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 외교학 석사, 하와이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스탠포드대 대학원 통계학 석사, 동 대학원 경제학 박사 과정을 이수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였다. 경제에 전혀 문외한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알기 쉽게 풀이하는 능력은 독보적이었다는 전언이다. 일화로 김재익 수석이 노모를 앉혀 놓고 인플레이션을 설명하면서 '인플레이션은 돈에 물타기'라 빗댔고 임금을 '사람의 가격'이라 칭하면서 노모에게 각종 어려운 경제용어를 이해시켰다는 설명이다.

그의 뛰어난 능력에 감탄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정권을 잡자마자 그를 청와대에 불러들여 경제수석을 제안한다. 그러나 김재익은 정권의 얼굴 마담으로만 활용되는 건 아닌지 우려했고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제가 원하는 대로 일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 맡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전두환 전 대통령은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말하며 전권을 약속했다. 이후 제5공화국 경제 전반에 걸쳐 김재익 수석의 능력이 발휘됐고 1980년대 경제 고성장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

김재익 수석의 대표적인 정책으로는 물가안정화를 위시로 정보화산업, OECD가입, 수입자유화, 금융실명제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물가안정화는 지금도 전두환 정부의 대표 치적으로 언급될 정도다. 1980년 소비자 물가 상승율이 28%였던 것이 1982년 7%라는 기적적인 수치로 확 줄어들어버렸다. 그리고 1983년부터는 아예 3.5%를 넘기지 않을 정도로 저물가를 계속 유지했다.

김재익 수석이 저물가 기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가 개입해 경제를 이끌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기업과 시장에 대한 심판 역할을 해야 하며 그냥 내버려두었다간 '카지노판'이 돼버린다는 철학이다.

이를 반측하는 기업은 시장에서 퇴장을 시키겠다는 재벌주의에 대항한 강경책도 꺼내드는 등 지금의 공정거래법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다. 결국 김재익 수석의 저물가 기조는 근로자의 임금을 당장 크게 올려줄 순 없어도 물가 상승을 억제하면서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을 보장해주겠다는 뜻을 내포했다.

경제성장률 역시 1980년 -3.7%가 1983년에 12%대로 전 세계에 유래가 없는 파죽지세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더욱이 평균 10%대의 성장률을 꾸준히 기록해 우리나라의 경제 안정성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는 평판이다.

더불어 김재익 수석이 미래를 위해 추진했던 정보화산업은 지금에 와서 우리나라를 IT산업 강국으로 만드는 초석이 됐다. 김영삼 정부 들어 현실화됐지만 금융실명제도 김재익 수석의 작품으로 그의 정책 대부분은 시대를 앞서가는 것들이었다.

공교롭게도 금융실명제는 금융계의 고질적인 부패를 척결하고 지하경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려 전두환 정부의 각종 비리를 낱낱이 캐낼 수 있다는 위험부담에 현실화되진 못했다. 그럼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은 금융실명제를 최종적으로 승인해줬다.

금융실명제가 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전두환 측근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인들이 비자금 조성이 탄로날까봐 압박을 넣었다. 결국 전두환 전 대통령은 한발 뒤로 물러났다.

일각에서는 김재익 수석의 몇 가지 정책에 대해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비판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중화학산업 포기를 들 수 있다. 중화학산업 포기는 해당 물품들을 외국에서 싸게 수입하면 된다는 논리였으나 지금에 와서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 품목인 자동차 산업과 석유 화학 등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정책이었다.

그는 박정희 정권 시절 중화학 공업을 집중적으로 키워 놓는 바람에 그쪽 산업 의존도가 매우 높아져 개도국 위치에도 불구, 적자덩어리에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고 전한다. 지금은 없어서는 안 될 국가 핵심 사업으로 변모했으나 당시 우리나라 시장경제상 중화학의 자립도가 높을 수 없어 첨단 가공 등 타 산업에 집중 투자해 의존도를 상쇄하겠다는 판단이었다.

최근 대우조선해양 등 조선업계의 붕괴,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중공업 분야의 침체들을 봤을 때 김재익 수석의 중화학공업 포기 주장이 옳았다는 재평가도 나오고 있다.

농업지원정책은 호불호가 갈린다. 김재익 수석은 이중곡가제의 경우 매우 쓸모없는 정책이라 철폐를 주장했지만 식량자주권이라는 명분에서 이중곡가제의 철폐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중곡가제란 정부가 국내산 곡물을 생산자로부터 생산비용을 보상해줄 수 있는 가격으로 매입해 소비자에게 시장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고 그 차액은 정부 재정으로 부담하는 제도다. 이중곡가제는 쌀 생산량 하락과 이농현상을 막아줬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으나 농촌 경제를 자립시키지 못하고 국가 의존 농업으로 바뀌게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담으로 김재익 수석의 아들은 "광주에서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는데 아버지는 독재자를 돕고 있다"고 항의하자 김재익은 "경제의 국제화는 독재 정치를 어렵게 하고 내가 시장 경제를 도입하면 정치의 민주화는 당연히 따라온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김재익 수석의 친구들이 그를 '김일성 밑에서도 일할 친구'라 조롱하자 "만약 내가 김일성 밑에서 일해서 그 사람 생각을 바꿀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지"라고 반박했다. 지금에 와서 김재익 수석의 말처럼 경제 성장과 우리나라의 국제화는 시장 경제의 확대를 일으켰고 중산층의 부흥으로 의식이 확산되면서 독재를 무너트리는 간접적인 계기가 됐다.

김재익 수석은 1983년 10월 9일 마흔다섯의 젊은 나이에 북한의 아웅산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김재익 수석 맏형 김재룡은 1940년대 후반 서울대 유일의 서양사 전임 강사로 재직했으나 좌익 활동 혐의로 6.25전쟁 직전 체포됐다가 전쟁 발발 직후 불법적으로 한강변에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아버지는 대전에 있다가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도주할 때 반동이라며 살해당했고, 두 형은 인민군으로 끌려가 그대로 행방불명됐다. 김재익 수석 역시 이념 갈등이라 할 수 있는 아웅산 테러로 목숨을 잃어 전 가족이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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