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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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가설
신효성 소설가/기호일보 독자위원
  • 기호일보
  • 승인 2017.01.10
  •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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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효성 소설가
‘할머니가 떠났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공식적으로 생을 마감한 범고래 이야기다. 100년을 넘기고도 5년을 더 살아 105세에 바다 물결 속으로 몸을 뉘어 사라진 암컷 범고래 J2의 인생은 많은 것을 짚어보게 한다. 한 세기를 넘기며 가모(家母)로 무리를 이끌었던 할머니는 안전한 이동 경로를 찾아내고 먹잇감이 풍부한 장소로 식솔들을 이끌어 안전하고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혜를 발휘했다. 미국 고래연구센터에서 지난 40년간 추적 관찰했던 범고래 무리 중에서 할머니 범고래 J2는 돋보이는 존재였다고 한다. 1976년 4월에 한 무리의 범고래를 발견한 고래연구센터에서 그중 나이가 많은 수컷에게는 J1, 암컷에게는 J2라는 명칭을 붙였다. 이 암컷 범고래는 오래 동안 살았고 탁월한 지도력으로 무리의 번성을 이뤘다.

포유류 중에서 폐경을 맞는 동물은 소수라고 한다. 대다수는 죽을 때까지 새끼를 낳는데 사람과 범고래와 들쇠고래만 폐경을 한다. 임신과 출산, 양육이 노쇠한 몸에는 엄청난 체력전이라 가솔을 이끌 우두머리 역할을 하기에는 벅차고 미덥지 않다. 사람과 범고래는 40대까지 출산을 하고 이후에는 폐경이 와서 생식능력을 잃는다. 대신 자손을 돌보고 혹독한 자연환경을 이겨내는 지혜로 무리의 번성을 도모한다. 고래연구센터에서 추적 관찰한 바로는 무리의 앞에서 식솔을 이끄는 나이 먹은 암컷 범고래는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젊은 암컷보다 32%, 성년이 된 수컷보다 57%가 더 많았다고 한다. 오랜 경험으로 생존의 지혜를 가진 나이 든 암컷이 없다면 한창 팔팔한 나이인 30살 이상의 수컷 범고래의 사망률이 무려 14배나 증가한다는 연구보고서다.

사람의 경우도 폐경을 맞은 노년의 할머니 역할을 중요하게 평가한다. 영국 셰필드대학교의 루마 교수가 발표한 논문을 보면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캐나다와 핀란드 여성 3천 명을 추적 조사했더니 폐경 이후에 10년마다 자손이 2명 정도 더 태어났다고 한다. 할머니가 오래 사는 집안은 자손들의 출산율도 높아지지만 손자손녀들이 별 탈 없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비율도 매우 높다고 한다. 종족의 번성을 위해서 할머니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연구결과다. 이를 ‘할머니 가설’이라고 한다. 사람의 생태와 유사한 범고래의 생태 역시 할머니 가설을 증명한다. 노산의 위험을 포기하고 자손을 돌보고 잘 보살피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유전자를 대대로 이어가 자손을 번성하게 하는데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기에 폐경으로 진화한 것이라고 본다. 풍족하고 평화로운 시기보다는 힘들고 어려울 때 할머니의 지혜는 빛이 난다.

사람도 범고래도 오랜 삶의 경험이 축적돼 상황에 맞는 판단으로 생존에 도움을 받는다. 언제 어느 곳으로 가야 먹이가 있는지, 이동 중에 만나는 바다 물길을 피하거나 이용하는 방법과 포식자를 피하거나 물리치는 방법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생존의 방법이다. 고래연구소에서 살펴본 바로는 범고래의 먹이인 왕연어의 개체수가 줄어들수록 무리를 이끄는 할머니 범고래를 더 자주 목격하게 된다고 한다. 한 해가 저물었고 새해가 시작된 연초다. 묵은 것은 새 시대에 맞지 않고 효율성 면에서도 비경제적이라고 곧잘 배척한다. 과학의 발달이 사람의 직관을 눌러서 대세가 된 세상이다. 오랜 세월에 녹아나오고 쌓여진 경험은 고리타분하고, 늙은이 아집이라고 무시당하기도 한다. 다 좋을 수는 없어도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축적한 삶의 연륜은 나름대로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할머니 가설’은 만물의 영장이라 자칭하는 인류의 보물임에 틀림이 없다. 딸의 애기, 즉 외손녀를 키워주고 있는 내 친구가 딸이 책에서 배운 육아 지식을 들먹이며 걸핏하면 친정 엄마의 육아 방법을 지적하면서 무안하게 만든다 해서 나눈 이야기다. 비과학적이고 무지한 할머니로 낙인찍혀서 서럽다는 친구를 위로하며 속성으로는 절대 쌓을 수 없는 삶의 경험을 가진 연륜에게 가치를 부여하자며 친구를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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