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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순희 수필가
겨울안개였다. 이번 겨울 들어 벌써 몇 번을 마주한 안개인가. 예년 겨울과 다른 푸근한 이상기온이 가져 온 안개였다. 봄여름가을에 마주하는 안개는 몽환적이고 신비스럽고 무언가를 기대케 하는 느낌이다.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짙게 깔렸다가도 어느 순간 일시에 싹 걷혔다. 안개가 사라진 뒤 쏟아지는 햇살은 더욱 눈부셨다. 이와 달리 겨울안개는 우울과 상실이 축축하게 스며있다. 짙은 농도가 아님에도 무거웠다. 쉬 걷히지도 않는다. 미지근한 햇살을 피해 나무둥치에, 건물에, 주차된 차들 사이에 노숙자처럼 종일 머물렀다. 겨울안개를 대하는 날이면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에 갇힌 듯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전혜린(1934. 1. 1∼1965. 1. 10)을 알고부터 그리 되었으니, 벌써 33년째이다.

그이를 안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이가 아니라 그이의 글이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이미 생을 마감한 사람이 남긴 침묵의 언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였다. 아버지가 읽던 오래된 책들 사이에 그 책이 있었다. 누렇게 변색되고 습기로 인해 활자들이 군데군데 퍼진, 곰팡내가 코를 막게 하는 책이었다. 낱장끼리 들러붙은 곳도 있어서 페이지를 넘기기가 퍽이나 조심스러웠다. 무심코 집어 든 그 낡은 책은 오랜 세월 내 의식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때 마침 가스등을 켜는 시간이어서 제복 입은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좁은 돌길 양쪽에 서 있는 고풍 그대로의 가스등을 한 등 한 등 긴 막대기를 사용하면서 켜 가고 있었다. 더욱 짙어진 안개와 어둑어둑한 모색 속에서 그 등이 하나씩 켜지던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짙은 잿빛 베일을 뚫고 엷게 비치던 레몬색 불빛은 언제까지나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에서.

33세에 요절한 전혜린은 유학을 떠난 독일에서의 첫날을 이렇게 묘사했다. 낯선 이국땅에서 후들거리는 감정을 추스르며 간신히 버티고 선 그이가 보였다. 담담한 문체였지만 툭 치면 바싹 마른 낙엽처럼 바스러질 듯 위태롭게 다가왔다. 그 위태로운 감정을 위로하고 감싼 것이 안개였다. 문장 문장 기저에 깔린 찬 안개는 그이의 젊은 열정을 지배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이의 눈에 비친 뮌헨의 안개는 뜨거운 듯 냉랭했고, 신열에 들뜬 듯했지만 무심했다. 첫 장부터 날카롭고 지적인 그이의 언어에 사로잡혔다. 안개에 싸인 뮌헨 구석구석을 말했지만 오히려 무거운 침묵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이의 그 침묵의 언어를 통해 헤세를 탐독했고, 이미륵과 루이제 린저에 골몰했다.

열일곱 살 정제되지 않은 내 의식을 점령한 또 한 가지는 그이의 검은 눈동자도 한몫했다. 우수에 젖은 그이의 눈은 들여다볼수록 매혹적이었다. 무서우리만큼 날카로운 고요가 내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서른셋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의 비극을 담은 눈빛은 그러한 것이라 정의했다. 음습하고 눅눅한 겨울안개로 인해 그이는 그토록 고독했지만, 그것은 또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안개에 대한 설렘이나 그리움이 상실되었을 때, 삶을 마감했다고 단정했다. 내가 아는 한 서른세 살은 완전한 나이였다. 열일곱 살에겐 아직 먼 훗날이었지만, 내 삶도 서른셋에서 멈추겠다는 결심을 했다. 서른세 살 이후는 더 이상 설렐 일도 이뤄야 할 그 무엇도 존재할 것 같지 않았다. 그리하여 숫자 ‘33’은 영원불멸의 숫자로 각인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서른세 살을 지나왔다. 강물이 기수역에서 바닷물과 섞이듯이 아무렇지 않게. 그리고 올해, 그로부터 열일곱 번째 새해를 맞이했다. 숫자가 바뀌고, 달이 가고, 새해가 되었다고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다. 새로운 무엇이 있을까 꿈을 꾸고, 가슴 뛰는 일이 곁에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33년 전 전혜린을 처음 알았던 그 후, 더는 그 책을 읽지 않았다. 한때 내 이성을 마비시켰던, 그이에게 매료된 홍안(紅顔)의 내 시절을 치기어린 감상으로 치부할까 저어해서였다. 그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듯이, 나 역시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냥 겨울안개의 심연에 순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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