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금빛 넘치는 금빛 낙엽들/햇살 속에서 그 거죽이/살랑거리며 말라가는/금빛 낙엽들을 거침없이/즈려도 밟고 차며 걷는다//만약 숲 속이라면/독충이나 웅덩이라도 숨어 있지 않을까조심할 텐데//여기는 내게 자명한 세계/낙엽더미 아래는 단단한, 보도블록//보도블록과 나 사이에서/자명하고도 자명할 뿐인 금빛 낙엽들//나는 자명함을/퍽! 퍽! 걷어차며 걷는다//내 발바닥 아래/누군가가 발바닥을/맞대고 걷는 듯하다."('자명한산책' 전문)

중견시인 황인숙(45)씨가 5년만에 낸 다섯번째 시집 「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사 刊)은 표제작처럼 역설로 가득 차 있다.

흙의 부드러움을 차단하고 있는 도시의 콘크리트는 자연과의 교감은 물론 삶에 대한 회의와 번민까지도 가로막는다. 시인은 숲의 정령들이 사라진 세계, 너무 밝고 뻔해서 상상력이 숨쉴 수 없는 공간을 산책하며 '환한 대낮의 비애'를 맛보고 있는것이다.

역설을 통해 삶과 예술의 진정성에 이르려는 시인의 태도는 다른 시편에서도 발견된다.

"백화점 명품관은 그녀의 시집/때때로 그녀는 삶을 고양시키려/그곳을 기웃거리네"('시' 중)는 "우리에게 시가 사치라면 우리가 누린 물질의 사치는 시가 아니었을까"라는 박완서의 역설적인 글에서 출발하고 있다.

시인은 "허황되고도 아름다운 그녀/그녀의 머리는 시로 가득하네"라는 역설을 통해 자신의 시적 상상이 물질적 사치를 추구하는 '허황된 그녀'의 욕망과 다를 바없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검열한다.

시인의 욕망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내 꽃다운 스무살은?//나랑 바다에 가서 놀자"('네 마흔 살' 중)라거나 "그때 너는 청년의 몸매를 갖고 있었다/희고 곧고 깨끗한/아, 청량한 너의 청년"('방금 젊지 않은 이에게' 중)이라거나 "전엔 나도 햇볕을 /쭉쭉 빨아 먹었지/단내로 터질 듯한 햇볕을"('아, 해가 나를' 중)처럼 '과거의 젊음' 쪽으로 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한 욕망들은 "기가 막히다/세월의 빠름이, 아니 사실/빠른 건 모르겠는데/세월의 많음이"('주름과 균열' 중)라거나 "나는 기억의 서민/나는 욕망의 서민/나는 생(生)의 서민"('노인' 중)처럼 '나이 듦'에 대한 노래들을 통해 다스려진다.

"이 길에선 모든 게 기울어져 있다/정일학원의 긴 담벼락도 그 옆에 세워진 차들도/전신주도 오토바이도 마을버스도/길가에 나앉은 툇돌들도 그 위의 신발짝들도/기울어져 있다"('해방촌, 나의 언덕길' 중)는 시에 이르면 '가난'과 '고난'을 걸머진 시인의 치열한 실존의식이 이번 시집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번 시집의 수록작들은 시인이 사십대에 들어서 쓴 것들이어서 완숙미가 가득하다. 시인 특유의 경쾌하고 생기발랄한 언어감각은 여전히 살아있다.

시인은 "등단한 지 스무해가 꽉 차간다. 그동안 써온 시들을 생각하니 얼굴이 달아 오른다. 돌이켜 보면 나는 시에 있어서도 후한 값을 받고 살았다. 그게 다 빚이다. 힘을 내서 빨리 빚을 까자"면서 "내 시가 최소한 세상에 악취를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것이 내 소극적 바람이다. 적극적 바람은 즐겁게 시를 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281쪽. 6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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