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4월 3일 오후 9시 50분께. 여자친구와 함께 이태원 햄버거집을 찾은 홍익대생 조중필(당시 22세)씨는 소변을 보기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좁은 화장실에서 그는 소변기 앞에 섰다. 그런데 곧바로 조씨를 따라 들어온 미국인 10대 2명이 있었다. 접이식 칼을 손에 쥔 한 명이 조씨의 뒤에 다가갔다. 그러더니 아무 이유도 없이 칼로 오른쪽 뒷목을 찌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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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9월 국내에 송환된 아더 존 패터슨
 새빨간 선혈이 화장실 벽을 향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조씨는 돌아서서 칼질을 막으려 했지만, 오히려 가슴팍과 왼쪽 목을 8차례 더 찔렸다. 10대들은 도망갔고 조씨는 병원 이송 중 눈을 감았다.

 범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붙잡혔다. 재미교포 에드워드 리와 미군 군속의 아들 아더 존 패터슨이 장난삼아 벌인 일이었다. 그러나 17세 동갑내기인 이들 중 누가 조씨의 목숨을 앗아갔는지 밝히는 데는 무려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검찰과 법원이 엉뚱한 결론을 내는 동안 진범은 도망갔다.

 애초 살인범으로 기소된 건 리였다. 사건을 초동수사한 미군 범죄수사대(CID)는 패터슨을 지목했지만, 한국 검찰은 ‘조씨에게 반항 흔적이 없는 만큼 그를 제압할 정도로 덩치가 큰 사람이 범인’이라며 180㎝·105㎏의 리가 살인범이라 판단했다.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서도 리는 거짓 반응을 보였지만 패터슨은 진실 반응이 나왔다. 당시 국내엔 혈흔 분석과 같은 과학수사기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리는 살인 혐의로, 패터슨은 증거인멸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 됐다.

 1심과 2심은 두 사람의 죄를 모두 인정했다. 리는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20년을 받았다. 패터슨은 1심 징역 1년6월, 2심 장기 1년6월·단기 1년형에 처해졌다. 정의는 그렇게 실현되는 듯했다.

 하지만 1998년 4월 대법원이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리를 무죄로 판단하며 상황은 달라졌다. 리는 1999년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검찰은 뒤늦게 패터슨을 재수사하려 했지만, 미국으로 도주했다. 석방 후 검찰이 실수로 출국정지를 연장하지 않은 것이다. 사건은 죽은 사람만 있고 살인자는 없는 ‘뇌사 상태’에 10년 넘게 빠졌다.

 영구미제가 될 뻔했던 사건은 2009년 10월 패터슨의 미국 소재지가 확인되며 해결 실마리를 찾았다. 패터슨은 201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체포됐고, 그해 12월 한국 검찰은 살인 혐의로 패터슨을 기소했다.

 패터슨은 자국에서 인신보호 청원을 제기하는 등 4년간 송환을 회피하려 했지만 결국 양손이 포박된 채 2015년 9월 국내로 송환됐다. 검찰은 혈흔 분석 등 새 증거를 근거로 패터슨이 리의 부추김에 조씨를 잔혹하게 살해했다며 법정에 세웠다.

 패터슨은 리가 진범이라고 항변했지만 1심과 2심은 검찰 구형대로 법정 최고형인 징역 20년 형을 선고했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도 25일 원심의 징역 20년을 확정했다. 법원은 리 역시 공범으로 판단했지만, 리는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추가 처벌은 받지 않는다.

 검찰과 법원이 두 명 중 진짜 범인 한 명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50대 중년이었던 아버지 조송전(77)씨와 어머니 이복수(75)씨는 이제 백발노인이 됐다. 부모는 딸 셋을 낳은 뒤 어렵게 얻은 막내아들을 가슴에 묻고는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을 청하지 못했다. 그간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 이제는 마음속에 분(憤)만이 남았다.

 이날 대법원의 확정판결에 따라 패터슨이 죗값을 모두 치르는 데는 이제부터 또 다른 20년이 걸리게 된다. 그러나 부모 가슴에 뚫린 깊은 구멍이 언제쯤 메워질 수 있을지는 누구도 가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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