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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범 아나운서
중학교 2학년 즈음 겨울방학이었다고 기억됩니다. 한 친구가 열심히 읽고 있는 책이 있어서 살펴보니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이었습니다. 때마침 텔레비전 방송의 명화극장에서 ‘오리엔트특급 살인사건’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면서 원작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습니다. 결국 저는 방학기간 내내 하룻밤에 한 권씩의 속도로 시리즈를 섭렵하기 시작했습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은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는 도저히 중단할 수 없을 만큼의 재미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탐정 포와로와 미스 마플은 각각의 시리즈에서, 전혀 실마리가 없는 미궁의 사건들을 인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으로 척척 풀어냅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수많은 작품들 중 백미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고, 저는 꼽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소설 속의 주인공인 에르큘 포와로의 부고 기사가 미국의 유수 언론에 실렸다는 것입니다. 뉴욕타임스는, 작가의 마지막 작품인 「커튼」에서 죽음을 맞은 에르큘 포와로의 부고기사를 지면 첫 머리에 실어 소설 속 명탐정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뜻일 겁니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50여 년 동안 장편 66권, 단편집 20권을 발표해서 추리소설사상 가장 인기 있는 작가가 됐고 1971년에는 추리소설에 대한 공헌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데임) 작위까지 받았습니다.

 영국에 애거서 크리스티가 있다면 일본에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생소한 분들이라도 그의 대표작인 「용의자 X의 헌신」, 「백야행」,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의 작품 이름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은둔의 작가로 알려져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는 작가 데뷔 30여 년 동안 무려 84작품이나 발표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고 최근에는 영미권과 중국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는 슈퍼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박인곤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왕팬이자 전문가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백야행」이라는 작품을 접하고 팬이 됐다고 합니다. 박 교수는 히가시노의 작품들 중 국내에 번역된 70권의 작품을 버전별로 약 150권 정도를 소장하고 있고 심지어는 일본 원서로도 100권 이상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세계 최초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전문으로 다루는 팟캐스트 방송 ‘THE 히가시노 게이고’(http://www.podbbang.com/ch/13103)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수많은 작품들, 그리고 작품의 뒷이야기까지 풍성한 화제로 구성되는데, 국내의 많은 히가시노 게이고 팬들의 사랑방 역할까지 하고 있다고 합니다. 박 교수가 나름대로 정리한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이 인기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술술 읽히는 재미, 궁금증 유발과 반전, 소재의 다양성, 작가 특유의 인간에 대한 정서 등입니다.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정작 히가시노 작가 자신은 어린 시절 만화책도 읽지 않을 정도로 독서를 싫어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싫어하는 자신 같은 사람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을 여러 권 번역한 권일영 번역가는 사회와 이웃에 대한 관심, 쉽고 간결한 문장, 참신한 소재 등을 히가시노 작품의 장점으로 꼽았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인간에 대한 통찰과 사회의 부조리와 문제점들에 대한 고발도 고명처럼 들어가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그의 한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을 견뎌 가면서까지 무언가를 성취하려 하지 않는다. 힘든 상황에 처하면 우선 책임을 전가하고, 그 다음에는 포기를 하든지 무기력해질 뿐이다. 그리고 비극의 주인공인 양한다." 작가가 소설 속 주인공의 입을 통해 하는 말입니다만 인간의 본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회에 대한 관심과 통찰은 비단 작가들에게만 필요한 덕목은 아닐 것입니다. 2017년은 ‘두루 살핌’의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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