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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수년 전에 동영상 하나가 인터넷에 올라와 세상을 충격에 빠뜨린 적이 있었습니다. 중국의 어느 여성이 자기가 신고 있는 하이힐로 살아 있는 고양이를 밟아 죽이는 장면이 담겨 있었던 겁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병원에서 근무하는 약사였고, 동료들은 그녀가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약사라는 전문직 여성으로 남부럽지 않을 삶의 조건들을 두루 갖추었는데, 왜 이런 끔찍한 일을 자행했을까요? 그러나 겉모습과는 달리 결혼 17년 만에 이혼을 당하는 등의 말 못할 사연들이 많이 있었나 봅니다.

 어느 누구라도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개개인의 속을 들여다보면 아마도 한 가지 이상의 아픔이나 고민을 가지고 삽니다. 다만 특별한 사이가 아니면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요.

 자신의 힘겨운 상황을 세상에 향해 불평이나 분노로 표출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내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남 탓’이나 ‘세상 탓’을 하면서 불만이나 불평을 입에 달고 살게 됩니다. 이렇게 남 탓을 하는 사이에 자신은 정작 원하지 않던 불행의 늪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 듭니다.

 황급하게 이삿짐을 꾸리는 올빼미를 본 비둘기가 물었습니다.

 "어디로 이사를 가려고 하니?"

 "응. 이곳에선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이 동네 사람들이 내 울음소리를 듣기 싫어해. 어린애들까지도 나만 보면 새총을 쏘아대니, 너 같으면 살겠니?"

 올빼미의 이런 말에 비둘기는 점잖게 나무랍니다.

 "그래, 사람들이 자네 울음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건 사실이야. 그런데 문제는 자네 울음소리가 아니니? 자네 울음소리를 고치지 않고 어디를 가든 환영받지 못할 거야."

 본질적인 문제는 결국 ‘나’ 안에 있는 것인데도, 세상 밖의 조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어디로 이사를 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장자」에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늘리지 말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또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반신불구가 되지만, 미꾸라지도 그렇던가? 사람은 나무 위에 오르면 벌벌 떨지만, 원숭이도 그러하던가? 셋 가운데 어느 쪽이 올바른 거처를 알고 있는 건가?’

 학이 보기에 오리 다리가 너무 짧아서 뒤뚱뒤뚱 걷는 모습을 보면서 무척이나 애처로웠나 봅니다. 그래서 조금만 길게 해주면 더 쉽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을 했겠지요. 반면에 오리는 학의 다리가 너무 가늘고 길어서 걸을 때마다 위태롭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다리를 조금만 잘라주면 안정감 있게 걸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학이나 오리처럼 생각하고 사는 지도 모릅니다. ‘나’만의 기준과 판단으로 ‘너’를 판단하고 평가할 때는 늘 나와 너의 관계는 적대적 관계가 되어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겠지요.

 블랙리스트 작성과 관련해 발생하고 있는 오늘날의 불행한 정국 상황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학은 다리가 길어서 좋고, 오리는 다리가 짧아서 좋은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사람이나 미꾸라지나 원숭이 역시도 자신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을 선택해 삽니다. 이렇게 다른 것은 달라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다름’을 ‘나’만의 기준으로 ‘틀렸다’고 판단한 결과, ‘남 탓’을 하면서 불평과 불만을 토해내는 것은 아닐까요?

 ‘매사에 불평과 불만이 많은 사람은 천국에 가서도 오류를 찾는다!’는 격언까지 있는 것을 보면, ‘네 탓’ ‘세상 탓’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비둘기가 올빼미에게 충고한 말처럼 ‘우리들 자신’에게서부터 먼저 찾아야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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