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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성칠 여주시 건설행정팀장
엘빈 토플러는 부의 미래에서 기업이 시속 100마일로 가정한다면 정부는 25마일, 법은 5마일의 속도로 달린다고 했다. 사회는 법과 각종 제도를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발전에 따른 변화의 격차는 점점 더 커진다.

 현실과 제도와의 괴리로 공평성을 잃게 되면 병든 사회가 되면서 주민 간의 신뢰가 무너진다. 이에 따라 그동안 사회를 지탱했던 윤리와 도덕이 흔들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 틈을 메우는 것이 봉사다.

 여주엔 비각(碑閣)거리라고 하는 곳이 있다. 어떤 비가 서 있었기에 거리 이름을 비각이라 부를까? 비는 가장 많은 묘비를 비롯해 능비, 신도비, 순수비, 정려비, 송덕비, 공적비, 영세불망비 등으로 부른다.

 송덕비는 관직에 있으면서 은혜와 교화를 끼쳤을 때 백성들이 이를 생각해 비를 세워 선정을 기리는 것인데, 백성을 위협하거나 자신의 재물을 들여 억지로 송덕비를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1856년 여주에 큰불이 일어나 수백 가구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당시 판돈녕부사였던 김병기(金炳冀)가 사재를 털어 이재민을 구휼했기에 주민들이 은공을 잊지 못해 자안당(自安堂) 앞에 공적비를 세웠다.

 "금사7년 4월 12일에 화재가 발생하고 광풍마저 크게 일어 소재지 수천백 호를 일시에 불태웠다. 이에 남녀가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김영근과 그의 아들 판돈령 병기가 서울에서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현장을 살펴보고는 갖고 있던 수백 석의 식량과 돈을 풀어 사람들을 편안히 살게 했다. 이와 같은 연유로 돌을 다듬어 여강(驪江) 위에 비를 세우니 천백 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함풍(咸豊)10년(철종 11, 1860) 10월 일."

 지금은 이 비석은 영월루 아래편으로 옮겨져 있다. 당시 1천 호가량이 소실됐다고 하는데 1789년 조사된 여주의 가구는 6천654호였다.

 비각거리는 자안당 앞 김병기의 공적비가 있던 지역이다. 중앙통의 혼잡을 덜기 위해 시에서 이 지역에 여흥초등학교로부터 도로를 만들어 옛 모습이 사라진 상태다. 자안당 터는 현재 여주교육지원청 자리인데 김병기가 살았던 곳이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이곳을 여주군청으로 삼았다. 이에 김병기가 옆에 똑같은 집을 짓고 우안당(又安堂)이라 하니, 대원군이 "자식을 낳거든 김병기 같은 놈을 낳아야 한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김병기는 흥선대원군이 파락호 시절부터 교우한 인물이다. 흥선대원군 집정 시절 안동김씨 일파를 제거했지만 김병기는 살아남았다. 개인적인 의리도 있었지만 지역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모양이다.

 김병기는 이에 그치지 않고 세종대왕의 원찰인 신륵사의 법당과 구룡루 보수에 크게 시주했다. 비각거리의 공적비와 신륵사 송덕비는 같은 시기에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두 곳을 크게 도운 것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송덕비를 세웠는데 신륵사 은행나무 아래에 있다.

 영월루에는 기동보린사(畿東保隣社)비도 있다. 1927년 독지가 이민응(李敏應) 일가와 군내 유지들이 법인(法人) 기동보린사를 설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이민응은 흥천면 외사리에 살았는데, 아들 이재정, 조카 이재경과 함께 벼 1천 석을 출자해 주민들의 생활 안정과 농촌 진흥을 목적으로 법인 기동보린사를 설립했다.

 이후 저렴한 이자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금을 대부해 빈민구제 사업을 펴고 농도강습소를 창설해 농촌지도자를 양성했다. 여기에 군내 유지 561인이 동참했다고 한다.

 사회발전으로 미풍양속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도 있지만 가진 것이 없어도 스스로 몸을 희생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람들도 많다. 이 봉사가 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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