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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홍 시인
신문을 보니 반가운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국립수산과학원의 명정인 박사팀이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명태 양식실험에 성공했다는 낭보다. 세계 최초의 완전양식 성공이라는 설명도 붙어 있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돌이켜보면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명태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다 고기였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되는 장면도 있다.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면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이어서 흑백 화면으로 방영되는 ‘대한뉴스’가 있는데, 화면에 북태평양에서 조업 중인 원양어선의 갑판 위로 양망(揚網)된 그물이 찢어질 듯 명태가 잡혀서 올라오는 장면이다.

실제로 당시 조업에 나섰던 선배의 농 섞인 경험담을 들어보면, 얼마나 북어(北魚·명태)가 많았으면 북태평양에서 어선선단이 닻을 내릴 때 닻줄이 늘어져서 살펴 보면, 닻이 명태 떼의 등짝에 걸려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1980~1990년대 이후 온난화와 남획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연근해에서는 씨가 말랐고, 북빙양의 어획량도 감소돼 명태는 귀한 어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었다. 이제 우리 연구진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풍토에 적응되는 명태양식에 성공하였다니 기쁘기 짝이 없다. 누가 뭐라 해도 명태는 한국인의 정서가 녹아 있는 어종이다.

코흘리개 어린 시절에 말썽 피우다가 집안 어른한테 제사상에 놓여 있던 북어로 종아리를 맞은 일이 있다. 희미한 기억을 점고해보면, 그날 그 북어를 몰래 가지고 나와 뜯어 먹으며 눈물을 삼켰던 내 유년의 모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그 후로 북어처럼 질기고 질박한 인생 역정을 겪어 오면서 북어는 나에게 애초의 회초리 인연에서 친근한 반려로 자리잡아왔다.

청운의 꿈을 품었지만, 방황했던 청년기에는 포장마차에서 깡소주 안주로 노가리(새끼명태 말린 것)를 씹었고, 직장생활 중에 업무 관련해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황태(명태를 얼리고 말렸다 반복한 것) 국물로 분을 삼켰다. 또한 쉽게 풀리지 않는 가족사에 번민할 때에는 동태(겨울에 잡아 얼린 명태)처럼 퀭한 눈망울로 마냥 서있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 서운한 일만 있었을까. 기쁜 일이나 기분 좋은 회식 뒷날 오전에는 생태(얼리지 않고 말리지 않은 명태)탕으로 속을 풀었고, 멀리서 벗이 찾아오면 코다리(반쯤 말린 명태) 요리로 주향(酒香)을 높였었다.

"이집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고/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짜악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오현명의 가곡으로도 유명한 양명문 시인의 시 ‘명태’의 중간 부분이다. 참으로 시 맛을 돋우는 서정과 명태의 고결한 서사가 깃든 명시다. 원래 명태는 수심 200~300m의 심해에서 사는 어족이다. 잡혀서 올라오면 기압의 차이로 인해 부레가 튀어나와 곧 사망하고 만다. 그런데 발표된 보도에 의하면, 얕은 해변에서 양식해 횟감으로 수족관에 입하할 계획이라니 회를 좋아하는 나로서도 부푼 기대를 감출 수 없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슴을 시원스레 적셔오는 느낌은 광어와 우럭과는 차원이 다른 명태의 품위 서린 귀환에 대한 나름의 감정이다.

내 뇌리에 각인돼 있는 젊은 날의 한 초상(肖像)이 있다. 안타깝게도 서른 즈음에 요절한 절친했던 친구가 그 주인공이다. 마른 몸매에 훤칠한 키, 그리고 조각같이 준수한 미남 청년이었던 친구. 빈한한 현실에서 벗어나 신분상승을 꿈꾸며 탁월한 두뇌를 유감없이 발휘하던 친구. 그러나 시대의 냉혹한 시샘이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어느 날 승용차 안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나의 추억 속에 그 친구는 전술한 ‘명태’ 시의 격조어린 소슬한 명태 이미지로 새겨져 있다. 그래서 북어라도 뜯으며 소주 잔을 기울일 때면, 그 친구가 빙그레 웃으며 앞에 앉아 있는 듯한 감상에 젖어서 허공에 술잔을 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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