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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바쁘다’라는 뜻의 한자어는 망(忙)자입니다. 이는 ‘마음(心)이 죽었다(亡)’라는 두 글자의 합성어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때로는 멈춤과 휴식의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는 가르침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무리 급하게 서둘러도 일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다려주거나 견디어내는 지혜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태풍으로 인해 학교 건물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기둥으로 쓰인 재목들이 모두 부러졌는데, 유독 두 개의 기둥만은 멀쩡한 것을 보고 의아해하던 사람들은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나무는 바닷가에서 자란 나무였던 겁니다. 매일 거친 바람을 맞으며 꿋꿋이 자라던 나무였기 때문에 웬만한 바람에는 내성을 갖추고 있었던 거예요. 산다는 것은 마치 시계추와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계추의 한 쪽 끝에는 ‘기쁨’이, 다른 한쪽 끝에는 ‘슬픔’이 있다고 하면, 우리의 삶은 때로는 기쁜 일로 환하게 웃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슬픔에 젖어 우울하게 보내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바닷가의 모진 바람이라는 아픔이 어느 날에는 위기를 극복하게 해주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금의 아픔을 견뎌내야겠지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싶은 도깨비가 사람들이 너무 똑똑해서 잘 속지 않는다며, 나이가 많은 도깨비에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열심히 살라고 말해 주라"는 의외의 답변을 들었다고 해요. 왜 그랬을까요? 열심히 산다는 것은, 목표를 향해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남들에게 일등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전혀 쉬지 않고 달린다면 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아마 불행일 겁니다. 이 우화를 소개하고 있는 「유쾌한 소통의 법칙」이란 책 속에는 프랑스에서 명상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틱낫한 스님의 이야기도 전하고 있습니다. 스님의 취미는 상추 가꾸기라고 하는데요. 어느 날, 상추를 가꾸고 계신 스님에게 방문객이 물었습니다. "스님, 스님은 상추 기르는 데에 신경을 쓰지 마시고 글 쓰는 데만 집중하셔요. 상추는 누구나 기를 수 있지만, 주옥 같은 글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아마 그 방문객은 텃밭을 손수 일구는 스님을 칭찬하는 말로 했겠지만, 스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저는 상추를 가꾸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답니다." 자동차로 치면 ‘글쓰기’는 ‘가속페달’이고, ‘상추 가꾸기’는 ‘브레이크’가 되겠지요. 질주하고 있는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면 결과는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우리의 삶도 그와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가끔은 쉬면서 지나온 길을 떠올리고, 가끔은 벗들과 함께 정을 나누고, 가끔은 실컷 게으름도 피우며 사는 것이 오히려 속도를 내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 되어줄 겁니다. 마치 봄을 기다리며 추운 겨울을 견뎌내는 꽃들처럼 말입니다.

 부모의 자식 교육도 기다림과 견뎌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임스 밀이라는 영국의 경제학자에게 호기심이 많은 어린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늘 질문으로 가득 채워진 수첩을 갖고 다니다가, 아버지를 만나면 집요하게 물어 보았습니다. 바쁜 일상을 보내고 귀가한 터라 휴식을 취해야 할 텐데도, 아버지는 단 한 번의 짜증도 내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문 아들의 질문 공세에 미소를 잃지 않고 답을 해주었습니다. 이런 교육에 힘입어 아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태도가 몸에 자연스럽게 배였고, 이런 태도가 결국은 위대한 경제학자와 철학자가 되어 세상에 큰 선물을 주는 어른으로 자랐습니다. 바로 「자유론」을 쓴 존 스튜어트 밀입니다. 기다림과 견뎌냄은 곧 잠깐의 멈춤을 뜻합니다.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곳곳에 피어난 아름다운 봄꽃과 맑은 하늘, 지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올 때가 멈춰 있을 때일 겁니다. 바로 그곳에 행복이 손짓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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