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희 수필가.jpg
▲ 김순희 수필가
올라가는 건 다 좋았다. 보고만 있어도 흥분이 되었다. 널뛰기, 시소, 그네, 미끄럼틀 등 놀이시설부터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비행기 등 생활 편의시설과 첨단과학 우주선에 이르기까지 올라가는 것은 가슴을 희열로 들뜨게 했다. 미처 겪어 보지 못한 미지에 대한 꿈과 희망을 품게 했다. 동경의 장소인 그곳엔 새로운 것들이 차고 넘칠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망의 자세였을 때이다. 직접 체험하는 주체가 되었을 땐, 얘기가 달라진다. 끝없이 이어진 나선형 계단. 별 생각 없이 일행의 뒤를 따르던 발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뒤처졌다. 무뎌진 발걸음과 격한 반응을 드러내는 몸이었다.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몇 계단만 오르면 꼭대기에 도달할 줄 알았던 건 착오였다. 계단참도 없이 둥글둥글 끝없이 이어진 계단, 영도 등대에 오르는 중이었다. 발과 팔은 제각각 덜덜 거려,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만 같았다. 긴장과 두려움이 몰려들어 눈앞이 하얗다가 검었다가, 연신 흑백의 세계를 오갔다. 그것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과 살아야 한다는 의지의 대립이었다. 어쩌자고 발을 뗐을까. 뒤에 오는 사람들은 폭 좁은 계단을 아무렇지 않은 듯, 나를 비껴 오르며 끌끌 혀를 찼다. 일행은 이미 다 올라갔는지 간간히 울리던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위를 올려다보지도 뒤를 돌아보지도 못했다. 내용은 간데 없고 제목만 각인된 책, 키르케고르의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녔다.

둘 중 하나는 선택해야 하는데, 선택 이전의 상태인 탄생과 소멸의 순간에 방치돼 있었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올랐을까. 끝없이 이어질 듯한 계단이 끝나고 출구였다. 순간, 다리가 풀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숨을 고르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내려갈 일이 또 걱정이었지만, 애써 올라온 그 시간을 누리고 싶었다. 삶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계단을 마주했던가.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매번 두려웠다. 금방이라도 저 밑에서 끌어당길 것만 같았다. 가보지 못한 세계와 도달하고 싶은 삶이 계단과 계단을 잇고 있었다. 두려움을 견디고 오르고 싶은 곳에 정작 이르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삶을 돌아보는 것이 전부였다. 극한의 고통에 처했을 때 무심코 지나쳤던 삶을, 주변을 돌아보게 되는 모순이라니.

등대에 오른 많은 사람들과 내 일행은 등대 앞에, 통유리 밖에 펼쳐진 풍광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그들의 환호성으로 바다, 배, 바위섬, 수평선 등을 듣고 보았다. 주저앉아 귀로 대하는 풍경은 부러움도 시샘도 아닌 그냥 삶 자체였다. 남들에겐 보통의 길과 다르지 않은 가파른 곳으로의 보행이, 고소공포증을 가진 내겐 장애였다. 보편적이지 않은 장애로 인해, 핀잔을 들었고 때론 한심해 하는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속마음이 조금씩 다져졌다. 두려움과 절망으로 인해 인내가 길러졌고 부지런해졌다. 계단을 오르고 내릴 때마다 삶을 조절할 수 있는 용기를 배웠다. 올라갈수록 탁 트이던 시야는 내려올수록 협소해졌다.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삶의 풍경들이었다.

그들이 올라왔다. 무려 3년 만이다.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하고, 물리적 힘에 의해 들려 올라왔다. 어떤 식으로든, 올라온 것에 감격하며 마땅히 소리쳐 환호해야 했지만 그들의 귀환을 환영한 건 눈물과 오열이었다. 올라가든 올려지든 오르는 것을 보고 있으면 기대와 희망이 덩달아 부풀어 오르곤 했었다. 하지만 클로즈업으로 비춰주는 녹슨 형상을 좇다보니 현기증이 일었다. 나선형 계단을 돌고 돌아 영도 등대에 오를 때처럼 주저앉았다. 그 처참한 상태를 보니 그동안 두려움에서 터득한 삶의 지혜가 무용지물이었다. 다만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거기에 그들이 있어, 애타게 기다린 마음들이 안도할 수 있기를. 당연한 것에서 희망이 찾아지기를.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