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행정학박사.jpg
▲ 최원영 인하대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도토리 모자는 벗기면 안 돼. 왜에? 까까머리 까까머리 놀릴 테니까.’(문삼석, 도토리 모자) ‘우산 속은 엄마 품속 같아요. 빗방울들도 들어오고 싶어 두두두두 야단이지요.’(문삼석, 우산 속) ‘꽃들이 아이 더워 졸라대니까 나비가 펄럭펄럭 부채질해요. 새들이 아이 더워 졸라대니까 나뭇잎이 살랑살랑 부채질해요.’(서정숙, 여름 낮)

 참 예쁘지요? 동심은 도토리를 보면서 도토리가 당할 수모를 염려해주는 마음이고, 비 떨어지는 소리에서 엄마의 품속을 떠올리는 마음이고, 나비가 되고 나뭇잎이 되어 무척이나 더워하는 꽃과 새들에게 부채질을 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동심으로 살아가면 얼마나 행복할까를 생각해봅니다. 유치원 아이들의 그림일기를 보면, 아이들은 자신이 겪는 일을 아주 단순하게 ‘재미있다’와 ‘재미없다’로 여길 뿐입니다. "오늘은 아빠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탔다. 참 재미있었다." "창수와 싸웠다. 오늘은 참 재미가 없는 날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모든 상황을 ‘재미’라는 단순한 기준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재미가 있으면 즐겁게 놀면 되고, 재미가 없으면 재미를 찾아 나서면 되는 것이지요. 학자들은 행복을 ‘즐거움’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이미 행복의 비밀을 알고 있는 셈이지요. 그러나 배움이 많아질수록 또 나이가 들수록 행복은 점점 멀어져 갑니다. 그래서 조금 더 큰 아이들의 일기장에는 어김없이 ‘잘했다’와 ‘잘못했다’라는 선악의 판단이 적히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겠다’는 자기반성으로 마무리됩니다. 바로 기준이 생겼기 때문은 아닐까요. 기준은 세상을 바라보는 바로미터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내’ 기준으로 ‘옳다’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큰 스님인 조주선사가 어느 암자에 이르러 물었습니다. "계십니까?" 그러자 암자 주인이 나와 주먹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조주스님은 "물이 얕아서 배를 정박시킬 만한 곳이 아니구나"라며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걸음을 재촉한 조주스님이 다른 암자에 이르러 다시 물었습니다. "계십니까?" 그런데 그곳 주인 역시 주먹을 드는 게 아닌가요? 그런데 이번에는 조주스님이 절을 하며 말했습니다. "줄 수도 있고 뺏을 수도 있으며,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구나" 암자 주인의 주먹은 곧 ‘욕’일 겁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똑같이 주먹을 쥐었는데, 조주스님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습니다. 이미 유명한 조주스님 스스로가 ‘나는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기준으로 주인의 주먹을 보았을 때는 ‘나를 우습게 본다’라고 여겼을 겁니다. 그래서 ‘물이 얕아 배를 놓아둘 수 없다’고 했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큰사람이다’라는 기준으로 그의 주먹을 보았을 때는 ‘아직까지 나는 멀었다’라며 절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내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교만함이, 너의 기준에 맞춰 나를 되돌아보았을 때는 겸손함이 올라옵니다. 어른의 ‘교만함’과 아이의 ‘겸손함’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을 어느 방향으로 적용하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어른들은 기준을 ‘너’에게 적용하지만 아이들은 바로 ‘자신’에게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어른은 ‘네 탓’을 따지지만, 아이는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아닐까요. 네 탓을 따지는 어른들의 세상에는 늘 갈등과 분열, 그리고 분노로 가득하지만, 내 탓으로 돌리는 아이들의 세상에는 재미와 놀이로 가득하지는 않을까요.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