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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효성 소설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처자와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서른두 살, 살아온 시간은 신입도 중견도 아니라 불안정한 상태라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참을 찾고 싶었다 한다. 풋풋하지도 무르익지도 않은 애매한 나이라고 했지만 처자는 단단해 보였다. 달이 차고 기우는 시간을 고행으로 걸으며 처자가 길 위에서 경험한 시간들이 빛나 보였다. 종교와 상관없이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라 러시아, 이탈리아, 포르투갈, 프랑스, 핀란드 등 출발지가 다양한데 프랑스의 국경도시 생장에서 시작해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종착으로 하는 스페인의 북부를 걷는 순례길이 가장 유명하다. 장장 800㎞의 길을 하루에 20㎞에서 40㎞로 걸어서 한 달쯤 걸리는 대장정이다.

나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은 걷고자 계획을 세웠지만 번번히 장애가 생겨 시도하지 못한지라 아쉬움이 남아서 처자의 이야기에 푹 빠져 들었다. 처자는 잘 다니는 직장에 사표를 냈다고 한다. 부모님의 반대와 지인들의 염려를 뒤로하고 첫발을 내딛는 날, 스스로 느끼는 두려움에다 주변의 격려와 걱정이 뒤섞여서 씩씩한 출발이 아니었다 한다. 지난 이야기를 담담하게 얘기하는 처자의 그을린 피부에 흰 치아가 드러난 환한 웃음에서 에너지가 느껴진다. 서양인을 제쳐두면 동양인 중에서는 한국 사람이 많다고 한다. 갈등도 열정도 많은 국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따로 혹은 함께 만난 사람들과 걸으면서 생각이 많았다고 한다. 자연의 경의와 사람의 성정과 해결해야 하는 결정에는 갈등이 따르고 기쁨도 외로움도 배신감도 있어서 다스리고 버리는 동안 순례길은 오롯이 깨달아가는 길이라는 말이 와 닿았다 한다. 8kg을 초과하는 배낭 무게는 짐이 되어 걷기를 방해하니 무게를 줄이라고 했단다. 처자는 필요한 물건들이라 버릴 수 없어서 14kg나 되는 배낭을 메고 초인적인 결기로 걸었다 한다. 첫날은 적응도 안 된 상태에서 피레네산맥을 넘는 길이라서 힘이 들었고 무거운 발을 끌며 도착한 순례자들의 숙소 알베르게는 열악한 시설이었지만 도착했다는 성취로 힘이 났고 쉴 곳이 있어서 감사했다 했다.

누구를 구속하지도 누구를 의지하지도 않고 한 달을 걸으면서 나를 둘러싼 세상에게 평온한 시선을 보낼 수 있었고 사람과의 인연을 유난히 여겨 내 감정을 싣는 일도 옅어져 갔다고 한다. 스페인어를 모르는 처자는 동양인이 보이면 반가워 달려갔는데 각자의 계획된 시간이 있어서 무릎이 아파 힘들어하는 처자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마음이 다치는 일도 있었다 한다. 친밀의 표시로 함께에 익숙한 한국인의 특성상 숙소에서 함께 출발하고 함께 걷고 함께 쉬고 먹기를 당연시 여기는 처자에게 냉정하게 자기 길을 가는 순례자를 보면서 마음 비우기를 했다고 한다. 숙소에서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물건을 기부하는 모습을 보고 짐도 마음도 많이 내려 놓았다며 짐은 내가 껴안은 것이지 타인이나 세상이 덤터기 씌우는 것이 아님을 알아간 것만으로도 충분히 순례길은 의미가 있다고 한다.

 절대 필요한 물품 외는 배낭에서 들어냈고 필요한 누군가에게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고 배낭이 가벼워진 만큼 마음의 갈등도 옅어져 갔다고 한다. 한 겹 한 겹 내려놓을 때마다 몸도 마음도 홀가분해져서 감당할 수 있는 무게는 충분히 누릴 여유를 주었다 한다. 앞서고 뒤처지고 하다가도 알베르게에서 마주하게 되면 인사와 안부를 염려하는 마음에 또 감동받아 빚진 마음을 보상하려는 갈등이 생겨나는데 상대방은 전혀 대가를 원치 않아 되레 처자가 속상했다는 심정이 이해가 갔다. 친절이 친절로서 가치가 있어지려면 서로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아야 한다는 처자의 말은 나에게 조언이 됐다. 나 역시 감성에 빠져 세상의 인연들에게 상처 받는 일이 많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세상의 인연이 이기적이고 야속해 상한 마음이 속을 훑곤 했었다. 산티아고는 내가 걸어야 하는 순례길인데 체력도 관절도 배겨내지 못할 것 같아 여전히 시작이 두렵다. 처자의 순례길 경험을 알뜰하게 마음에 담아서 인연을 지어가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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