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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아, 가을입니다. 이제 곧 산천초목이 울긋불긋 변하겠지요.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은 단풍진 자연을 보면서 그동안 쌓인 고단함과 피로함을 말끔히 씻어낼 겁니다. 그러고는 곧 단풍은 낙엽이 되어 다가올 추운 겨울을 준비할 겁니다.

 단풍, 그리고 낙엽! 시인 도종환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정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추운 겨울 내내 나무는 옷 하나 걸치지 않고 묵묵히 혹한을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봄이 되면 싹을 틔워 생명의 기적을 세상에 알리겠지요. 여름이 되면 그 생명이 자라나 얼마나 씩씩한지를 자랑하면서, 한편으로는 더위에 지친 수많은 생명들에게 그늘이 돼 줍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나무는 자신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자신의 그 아름다움을 자기 혼자만 즐기는 게 아니라, 세상 모든 존재들에게 쉬어가라며 손짓합니다.

 모든 아픔, 모든 슬픔을 잊고 오색찬란한 자신을 보며 희망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러나 곧 다가올 겨울이라는 고통은 나무에게 결단의 순간을 요구합니다.

 1년 동안 그토록 고생하면서 만들어낸 자신의 최고의 모습인 단풍, 수많은 존재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자신을 이제 아낌없이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겨울이라는 혹한을 이겨낼 수 있으니까요.

 나무의 삶, 이것이 우리네 삶은 아닐까요. 이제야 법정스님이 "지금 이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다. 지금 이 순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다음의 나를 결정한다"고 말씀하신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무처럼 살라는 준엄한 가르침이겠지요.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나만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남들에게 그늘이 되어주는 삶, 그러고는 미련 없이 자신을 버리는 아픔까지도 받아들이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 말입니다.

 이 가을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이 떠오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침이면 태양을 볼 수 있고, 저녁이면 별을 볼 수 있는 나는 행복합니다. 잠이 들면 다음 날 아침 깨어날 수 있는 나는 행복합니다. 꽃이랑,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는 눈, 아기의 옹알거림과 자연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입, 기쁨과 슬픔과 사랑을 느낄 수 있고, 남의 아픔을 같이 아파해줄 수 있는 가슴을 가진 나는 행복합니다"라고요.

 참으로 아름다운 시입니다. 그리고 눈을 감고 저를 봅니다.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 그리고 말할 수 있는 입을 가진 저는 과연 남의 아픔을 같이 아파해줄 가슴은 가지고 있는가를 물어봅니다. 그리고 죄인인 듯 머리를 숙입니다. 아직은 그분과는 달리 지극히 평범한 사람임을 알았으니까요. 그러나 희망은 있습니다. 아직 살아 있으니까요.

 사랑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요시노 히로시의 시가 그 답을 줍니다.

 "생명은 자기 자신만으로 완결이 안 되는 만들어짐의 과정. 꽃도 암꽃술과 수술로 되어 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벌레나 바람이 찾아와 암꽃술과 수술을 연결하는 것. 생명은 제 안의 결여를 안고 그것을 타자가 채워 주는 것."

 그래요, 사랑이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설렘이나 흥분, 그리움은 단지 사랑의 절반일 겁니다. 시인의 말처럼 ‘나’의 부족함을 ‘너’가 채워주고, 동시에 ‘너’의 부족함을 ‘내’가 채워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지쳐도, 상대의 부족함을 채워주려는 노력이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가을 아침, ‘나는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주고 있을까?’ ‘나는 내 성취의 열매가 누군가에게도 기쁨으로 전해지고 있을까?’를 곱씹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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