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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효성 국제펜클럽인천지부 부회장
기차를 타 본 지가 참 오랜만이다. 빠름을 찬미하는 무한 속도 시대에 살고 있어서 느린 완행의 낭만보다는 속도전을 숭배하는 세상이라 누구나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게 해 주는 KTX를 선호한다. 그래서 나도 KTX 표를 예매하고 기차를 탔다.

 9월 18일이 철도의날이라는 안내 문구가 보인다. 역순으로 계산해 보니 올해가 우리나라에 철도가 생긴 지 118주년이 된다. 첫 증기기관차 도입이 1899년이다. 까마득하게 오랜 역사다. 장거리 교통수단으로 독점적이었던 위세가 다양한 이동 수단의 보편화로 약화되기는 했어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지속적으로 변화를 시도해 온 철도의 노력이 승객을 다시 끌어들이는 것 같다. 연착이나 교통 체증이 없어서 선호하는 추세라고 한다. 나도 이런 이유로 주말 장거리 이동에 열차를 탔다. 도시를 벗어난 자연은 조금씩 가을 색을 내는 중이었다. 계절의 순환은 예술처럼 아름다워 폭염이 물러난 하늘이 높고 맑아 눈이 시원했다. 철길 옆에 핀 코스모스 몇 송이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보인다. 문득 예전에 다녀왔던 간이역이 떠올랐다.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뽑혔다는 군위의 화본역을 찾아갔었다. 화본역은 증기기관차 시대의 유물인 급수탑이 있는 곳이라 풍경이 애잔하고 아름다운 간이역이다.

 우리가 갔던 계절은 가을이 절정이었다. 역 앞 화단에 코스모스가 가득했다. 철길 쪽에는 은행나무가 황금색 잎으로 바닥을 융단처럼 덮어서 은행잎을 주어서 한 무더기씩 던지며 어린 아이처럼 놀았던 기억이 난다.

 예전의 위용이 어쨌든 소멸은 쓸쓸하다. 담쟁이 줄기가 말라붙은 급수탑 내부를 구경했다. 50t의 물을 저장했다는 탑 상부의 물탱크는 우리나라에서 증기기관차가 완전히 멈춘 1967년 8월 31일 증기기관차 종운식을 끝으로 다시 물을 담아본 적이 없다. 급수탑은 사명을 다해 마름으로 갈증을 견디며 반백 년의 시간을 지키고 있었다. 임무를 시작한 이래 여든 살 가까운 세월을 역사와 승객과 철길을 지켜보며 장신의 키로 당당해 보였다.

 ‘간이역’하면 생각나는 시가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이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사평역에서’ 시는 70년, 80년대에 청춘을 통과한 사람들이라면 삶에 대한 교감과 성찰을 안겨준 문학작품으로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

 간이역은 조금은 쓸쓸하고 얼마간은 애상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는 장소다. 긴 삶의 여정에서, 먼 길의 여정에서 잠시 쉬어가는 곳이고 쉬면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임철우 소설가가 1983년에 발표한 소설 ‘사평역’은 시 ‘사평역에서’에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중심인물 없이 사평역 대합실 톱밥 난로 옆에 앉아서 막차를 기다리며 각자의 시선으로 서술자가 되어 다른 사람의 행동을 관찰해 서술한다. 초라한 삶에 대한 교감이다. 작가는 톱밥 난로의 불꽃처럼 인생은 아름다울 수 있다고, 중심이 되지 못해 주변인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출발하는 첫걸음을 태워다 줄 기차는 희망을 찾아가는 발걸음으로 의미 부여를 했다.

 소설에서 연착하는 기차를 기다리는 간이역 대합실에 모인 사람들 시선을 따라 작중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보여주듯이 우리의 삶도 타인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마음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 지나온 시간이 만든 퇴적층을 성찰의 시선으로 돌아보며 회상하는 서정적 시간을 이 가을에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간이역 역사 앞에 놓인 빨간 우체통에 엽서도 써 보내고 코스모스와 은행나무 색감 예쁜 풍경을 보며 기차 카페에서 쉬어도 보고 휘어져 구부러진 철길처럼 유연한 마음으로 나를 멈추고 천천히 가을을 거닐며 느린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 그곳 간이역에는 상·하행선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2번씩 운행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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