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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
지난 9일은 한글날이었다. 한글이 세계적으로 우수한 문자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속해온 ‘한자 문맹’ 정책이 과연 합당한지 의문이다. 이 정책이 초래한 부작용을 몇 가지만 보자. 첫째, 국민들 사이에 정확한 의미의 전달과 소통을 어렵게 한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의 이해력과 표현력은 매우 부족하고 부정확하다. 지난 1월 초엔 ‘금명간’의 뜻을 찾는 네티즌들이 폭증하기도 했고 ‘안하무인’을 ‘안아무인’ 또는 ‘아나무인’이라고 쓰는 사람도 자주 있다. ‘백년대계’를 ‘백년대개’로 쓴 신문기사도 간혹 있다. 최근에 만난 어느 고위공무원은 "요즘 고시 출신 엘리트 공무원들의 기안능력·보고서 작성 능력이 너무나 떨어진다"며 개탄했었다. 지도층인사가 문제를 일으킨 사례도 있다. 지난 4월 6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후보는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를 방문한 자리에서 방명록에 ‘滅私奉公’을 ‘滅死奉公’이라 오기했던 해프닝이 있었다. 둘째, 고등교육과 학문의 발전에 지장을 초래한다. 학술용어의 대부분이 한자를 알아야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오롯이 담긴 고전·격언·고사성어에 접할 수 없게 된다. 매우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예를 들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필귀정(事必歸正)’, ‘인내천(人乃天)’ 등의 의미를 청소년들이 알아야 하지 않을까. 요즘 청소년들의 비위행위가 많아지는 원인이 ‘한자 문맹’에 따른 인성교육 결핍에 있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작년 11월 헌법재판소는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한자교육을 선택과목으로 규정한 교육부 고시가 합헌이라고 결정했다(2016.11.24. 2012헌마854). 9명의 재판관 중 5명이 합헌, 4명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합헌 의견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자어는 앞뒤 문맥으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특정 낱말이 한자로 어떻게 표기되는지를 아는 것이 어휘능력이나 독해력, 사고력 향상에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고 보기 어렵다. 특히 요즘에는 인터넷이 상용화돼 한글만 사용하더라도 지식과 정보 습득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한자를 학교 재량에 따라 선택적으로 가르치도록 했다고 하여 학생들의 자유로운 인격 발현권이나 부모의 자녀 교육권을 침해한다고 볼 수 없다."

한편, 위헌 의견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자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 사상을 담고 있는 우리 문화의 주요 구성요소이며, 우리말 중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70%에 달한다. 또한 한자 학습을 통해 사고력·응용력·창의력을 기를 수 있고, 동아시아에서의 문화적 연대를 확산시킬 수 있으므로, 공교육 과정에서 한자 내지 한문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아이들의 연령과 발달 수준을 고려해 국가는 적어도 중학교 이상의 학생들에 대하여는 일정 시간 이상 한자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 따라서 한자 내지 한문교육을 통해 인격적 성장과 발전을 이루고자 하는 학생들의 자유로운 인격 발현권 및 부모의 자녀 교육권을 침해한다."

헌재의 결정은 ‘권리 침해 여부’를 중점 검토한 법적 판단이다. 말하자면, ‘위법성 여부’를 가린 것일 뿐이고, 여기에서 ‘한자 교육이 개인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지 여부’, 즉 정책적·미래지향적 측면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 이는 법적 판단이 갖는 한계이다. 약 2천 자 정도의 기초한자만 가르친다면 학생들의 학습 부담도 크게 늘지 않으며, 기대되는 학습효과가 훨씬 크다. 한자 교육은 확실히 더 많은 성공의 기회를 제공하며, 특히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경쟁력 강화에 매우 유용하다. 한자를 통해 한자권 국가(중국·일본·타이완·베트남 등)의 국민들과 기초적인 소통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쇄국정책 때문에 발전에서 낙오했었다. 국수적·폐쇄적 태도로 ‘한자 문맹’을 지속해 발전 기회를 놓친다면 후손들에게 또 한 번 죄를 짓게 된다. 한자 교육은 우리말과 글의 양적·질적 발전을 가능케 하고, 지성을 한층 함양시킬 것이다. 합리적·합목적적 정책 결정으로 헌재 결정이 법적 판단으로서 갖는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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