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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환 정경부장

한 운명이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이수영(75) OCI 회장이다. 고인의 발자취는 깊고 넓었다. 50년간 화학 한 우물 경영을 일군 대한민국 화학업계 대표 경영인, 재계 24위의 글로벌 기업, 태양전지의 핵심 소재인 폴리실리콘 세계 3위의 CEO. 태양광 및 화학 산업의 세계적 거목이었다.

 두 달 보름 전 또 다른 한 삶이 운명했다. 윤차웅(94) 씨였다. 그 촌부의 생은 고달팠고 남루했다. 몇 푼 안 되는 노인연금으로 버텨온 옹색한 삶이었다. 그가 살았던 인천시 중구 용동 10여㎡의 하꼬방 집 슬레이트 지붕은 허물어져 빗물이 스몄다. 단칸방은 볕 대신 곰팡이가 슬었다.

 명예와 부의 꼭짓점에 섰던 이 회장과 처절한 가난의 밑바닥으로 꺼졌던 윤 씨, 공교롭게 둘의 삶은 1960년대 인천의 매립에 닿아 있다.

 이 회장의 부친이자 OCI의 창업주 고 이회림(2007년 타계) 회장은 1965년 10월 인천시 남구 학익동에 소다회 공장을 착공했다. 대통령 공고 제1호인 경인종합개발 계획 발표 직후였다.

 하지만 공장을 짓는다고 해서 소다회가 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 15만t의 냉각용 공업용수가 필요했다. 학익동 공장을 끼고 인근 연수구 옥련동 일대에 수십 개의 시추공을 뚫었으나 지하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어마어마한 양을 수돗물로 충당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냉각수를 구할 수 있는 방도는 바닷물뿐이었다. 그렇게 매립사업은 시작됐다.

 지금 경인방송 해안도로 앞길에 물막이 공사 자리다. 길이 2천150m를 돌로 막아야 했다. 광산용 레일을 깔고 흙과 돌로 채운 나무틀로 둑을 쌓았다. 공사는 3년 만에 신화를 낳으면서 성공했다. 이렇게 얻은 땅이 남구 용현·학익동 256만5천690㎡였다. 민간 매립허가 얻어 일군 가장 넓은 땅이었다. ‘동양화학’이라는 이름으로 국내 중화학산업의 첫 깃발을 올렸던 곳이다. OCI로 이름을 바꾼 동양화학이 세계 3위의 소다회 생산기업으로 성장하는 발판이었다.

 윤 씨는 1964년 지금의 청라경제자유구역인 청라매립사업에 참여했다. 국제 민간구호단체와 정부가 지원하는 난민정착 사업이자 자조근로사업장인 청라매립사업의 총무이자 화약주임이었다.

 그를 포함해 전국서 몰려 든 헐벗은 영세민들은 곯은 배를 쓰다듬으면서 바다를 메웠다. 서구 고잔~장도~일도~청라도~문첨도~장금도~율도 간 길이 6.93㎞의 제방을 쌓았다. 품삯은 미공법 480-Ⅱ에 따라 하루 3.6㎏의 밀가루가 고작이었다.

 매립이 끝나 준공이 되면 내 땅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노역에 참여한 가구주에게는 1인당 9천900여㎡(1㏊)씩 분배한다’는 정부의 ‘자조근로사업 실시요령’에 대한 철석 같은 믿음이었다.

 그러나 그 믿음과 희망은 산산이 조각났다. 1㏊는커녕 송곳 꽂을 땅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최초 매립면허권자 봉덕학원 전 이사장이 일부(29만7천㎡)를 차지했다. 그 일가들은 대를 이어 부를 누리고 있다. 대부분은 봉덕학원 전 이사장과 양도양수 계약을 맺은 동아건설산업㈜의 차지였다. 동아는 매립(전체 3천630만㎡) 중이던 토지 일부(2천75만㎡)를 수도권 쓰레기매립지 용도로 환경부에 넘겼다. 그 금액은 523억 원이었다.

 동아는 또 쌀 생산 증대를 목적으로 터를 닦았던 나머지 농지 1천555만㎡를 담보로 잡혀 2조 원을 대출했다. 동아건설산업이 김포매립지에 투입했던 공사비 829억 원의 24배에 달했다.

 정부는 1999년 부도난 동아의 청라(김포)매립지 1천225만㎡를 6천355억 원에 사들였다. 3.3㎡당 17만2천 원꼴이었다. 현재 국영기업체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청라경제자유구역(1천778만㎡)으로 개발 중인 땅이다.

 따지고 보면 노역자들이 일군 청라매립지의 최종 수혜자는 정부다. 그러나 정부는 아무 말이 없다. 그저 영세민들이 근로자조사업으로 일한 정황은 인정되나 실제 일한 영세민들을 특정할 수 없다는 변명뿐이다.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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