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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훈 경기본사 경제문화부장
화가 난다.

변기에서 볼 일을 봤으면 물을 내려야 하거늘, 둥둥 떠 있는 부유물을 확인하는 순간 누구인지 모를 앞 사람에게 욕을 하고 싶어진다. 이는 누가 먹인 것도 아니고, 본인이 먹고 싶어 먹은 음식물의 퇴로(退路)가 되어준 변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만인이 평등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중화장실에 대한 모독이다. 급한 일 해결했다고 자기 손 더럽히지 않겠다며 밸브조차 손 대지 않는 심보는 인생에 있어 반드시 스스로에게 되돌아 오리라. 저주(詛呪)까지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래도 이 경우는 화만 날 뿐이다. 화를 참아 코를 막고 물을 내리는 순간 물이 내려가지 않는, 고장난 걸 알았을 땐 허탈하다. 무턱대고 앞 사람을 욕한 자아가 부끄럽게 다가오면서 동시에 앞이 막막해진다. 이 또한 그래도 낫다. 다른 칸을 찾아갈 수 있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 비참해진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굴욕적이다. 그래도 어찌하랴. 변기는 말이 없거늘. 참을 수 없다면 일을 볼 수밖에 없다.

 슬프다.

 주위를 둘러보면 나이가 들수록 소변을 볼 때 시원치 않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조준을 잘 하지 못해 엉뚱한 곳으로 튀기도 하고, 의도치 않게 바닥을 적시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변기 외의 둘레까지 오염(汚染)된다. 결혼한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그래서 앉아서 일을 봐야 한단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자에게 혼난다나. 남성의 권리를 빼앗긴 것만 같은 실소(失笑)가 나는 건 비단 혼자만일까. 뭐, 이런 경우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10대 혹은 20대 때를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횟수마저 줄어든다. 심장이며 위며, 간이며 모든 신체가 노화되는 마당에 배출 기능마저 떨어진다. 변기와 조우하는 시간을 기다릴 때도 있다. 이마저도, 여기까지는 괜찮다. 되레 빈뇨라면 말이 달라진다. 물론, 어느 연령대에서도 그런 증상이 올 수 있지만 고령일수록 확률은 높아진다. 그나마 병원과 약에 의지해 나아진다면 다행이다.

 화가 슬픔이 되고, 슬픔이 화가 될 때도 있다.

 양변기에 해당되는 이야기. 남성의 경우 소변을 위해서는 당연히 살과 맞닿는 좌변을 젖히고 봐야 한다. 그런데 이를 망각하고 아무렇게나 질러대는 인간들이 있다. 특징 중 하나는 본인 집에서는 절대 이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중화장실, 이 중에서도 술집 화장실이 좀 더 빈도가 높다. 알코올이 섞인 쾨쾨한 냄새는 대변을 보기 위해 들어간 뒷사람에게 적잖은 당혹감을 안긴다. 아무리 화장지로 닦아 내더라도 그 찝찝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상당수는 포기하고 다른 화장실을 찾아 나선다.

 여기까지는 화로 그칠 확률이 높다. 이후부터 슬픔이 시작된다. 화장실을 찾다 찾다가 어쩔 수 없이 되돌아 와야 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날 따라 화장실이 만원이거나 주변에 열린 화장실이 없을 때, 그리고 급할 때 그렇다. 이때부턴 고민이 시작된다. 뒤돌아보면 정말 찰나의 순간이지만 당시만큼은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의 장면이 지나듯 고통스러운 고민에 눌린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참을 수 있느냐, 그냥 더러운 걸 참느냐 하는 문제에 직면한 것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어느 때보다 진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급하다. 따라서 대부분은 후자를 택하게 된다. 어쩔 수 없다. 울며 겨자먹기다. 이후부터는 화가 나는 것인지, 슬픈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저 극복해야만 하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고나 할까.

 화가 나든, 슬프든 변기는 그야말로 ‘열일’을 해 낸다. 화와 슬픔을 만드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그저 또 한 번 화가 나고 슬플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화장실을 자주 가는 편이다. ‘과민성대장증후군’ 탓이다. 그래서 이 기회를 빌려 한 번쯤 말하고 싶었다. "변기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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