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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섭 인천시 재난안전본부장
너나없이 백세인생을 말하는 시대지만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낸 98세 어느 노(老) 철학자 정도면 몰라도 이제 겨우 지천명 문턱에 이른 주제에 감히 삶에 대해 말하기는 한참 아득하고 가당치 않아 보인다.

 그래도 앞으로 나아갈 길은 어지럽지 않게 살피고 가능한 사람 생각하며 살아가는 가치지향의 꼰대는 되어야지 생각하는데, 잔잔한 호수 같은 내 마음에 돌을 던지는 이가 있다.

 아내가 종종 나를 새가슴이라 핀잔이다. 좀 비싼 옷가지 하나 저지르지 못하는 등 매사에 좌고우면해 통 큰 결단을 못하고, 싫고 좋음을 얼굴에 감추지 못하는 서투름과 남을 흔쾌히 인정하는데 인색한 편협함, 그러면서 작은 연(緣)에도 연연(戀戀)해 상심(傷心)을 다반사로 하는 대범(大汎)치 못함이 새가슴의 징표들이란 거다. 가슴 한복판 뼈가 불거지지는 않았으니 신체적 새가슴은 아닌 터라 필시 겁 많거나 도량이 좁아 소심(小心)한 성격을 꼬집는 것일 게다.

 모든 언어와 상징은 문화다. 문화엔 사회역사적 맥락이 있고 그게 집단정체성과 고정관념을 형성한다.

 우리 사회에 오랜 남성본위 가부장적 문화에서 새가슴이란, 퍽 불쾌하고 듣기 싫은 기의(記意)를 품은 기표(記標)이니 나 또한 기분 나쁘고 억울함마저 들지만 그렇다고 그때마다 따지고 들자니 정말로 새가슴처럼 보일까봐 꾹 참곤 하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이를 먹을수록 새가슴이 되어가는 것 같다. 게다가 요즘엔 외려 새가슴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새들은 머리까지 나쁘다고 은유되지만 제니퍼 애커맨에 따르면 아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천재적이기까지 하다. 새의 가슴 또한 그리 가볍게 주홍글자 새길 일 아니다. 새를 욕보이는 것일 수 있으며 예의도 아니며 오히려 인간의 무지함을 드러낼 뿐이라는 건 다음의 몇몇 새가슴들이 웅변하는 바이다.

 부지런함과 끈기로 집을 짓고 새끼들을 키워내는 제비의 모성애는 그렇다 치자. 불혹의 나이 사십에 고집이나 필 줄 알았지 독수리처럼 각골(刻骨)의 혁신을 감행한 자 몇이나 될까. 까치나 까마귀처럼 받은 은혜 갚을 줄 아는 속마음 하얀 이는 또 몇이나 되나.

 강한 눈보라 치는 남극에서 서로의 체온을 지켜주기 위해 서로의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펭귄들의 더불어 사는 지혜, 앞서거니 뒤서거니 멀고 긴 생의 항로를 비행하다가 서로가 지칠 때마다 ‘힘내라(honk), 힘내라(honk)’며 목청껏 격려하는 기러기의 지혜는 아귀 같은 우리네 각자도생(各自圖生)보다 한참 고결하지 않은가.

 새가슴처럼 소심해서 나쁘지 않은 건 또 있다. 소심(小心)은 대담하지 못하고 조심성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인데 연전에 중국 출장길에 ‘小心小心’이란 문구를 곳곳에서 발견했었다. 이때 소심은 우리의 조심(操心)과 같은 말이다. 산불조심은 소심산화(小心山火)라는 식이다. 그러면 소심의 반대말은 대범이 아니라 다잡은 마음을 놓아버리는 방심(放心)이 된다.

 재난안전본부에서 근무하게 된 후론 생각도 거꾸로 하게 된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심오한 경구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안전에 관한한 조금 모자란 것이 전부의 실패를 부를 수 있기에 차라리 조금 넘치는 편이 낫다. 과선어불급(過善於不及)인 셈이다. 준비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한 인터뷰에서 위에 노 철학자께서 나름 백세인생을 행복하고 보람되게 산 비결을 ‘미리미리 조심조심’한 덕이라 한 것도 생각해보니 심상(尋常)하지 않다. 일전에 만난 전기안전공사 본부장님 명함엔 ‘전기안전 미리미리,’ 안전보건공단 본부장님 명함엔 ‘조심조심 코리아’라고 돼 있었는데, 이런 이심전심의 발견이라니.

 겨울이다. 폭설이 걱정이고 한파가 걱정이고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는 화재가 걱정이다. 우리 모두 각자 소심해지고 서로에게 ‘소심하세요’라고 덕담하는 겨울나기는 어떨까. 새가슴이면 어떻고 그보다 더 소심한 참새가슴이면 또 어떠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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