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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준기 인천대 외래교수
외교란 상대국과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 자국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총성 없는 전쟁이다. 국제 정세가 국가의 이해관계와 심각하게 맞물려 있을 때일수록 이 총성 없는 전쟁의 위력은 더욱 커지고 그 영향력은 한층 극대화된다. 국가 간의 외교적 태도는 서로 간의 힘과 의도와 목적에 따라 그 양상을 달리한다. 역사적으로 한·중 관계는 15∼16세기 조선과 명나라 간에 우호적이고 안정적인 시기도 있었지만 대부분 약소국과 강대국의 입장에서 형성되고 유지됐다. 게다가 조선은 후금과 시대 착오적인 외교 관계로 말미암아 끔찍한 참화에 시달려야 했다. 임진왜란은 불가피했더라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당시 인조와 집권세력이 외교적으로 조금만 냉철하고 현명하게 대응했다면 충분이 피할 수도 있는 전쟁이었다. 결국 이 전쟁의 화근은 국제 정세를 잘못 파악한 채 향명배금에 취해 척화의 결의를 다졌던 국왕과 사대 모화론자들에게 있었다. 만일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지 않았더라면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도 있는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광해군 집권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겨우 극복하고 안정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치며 그 사이에서 탄력적으로 실리를 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터였다.

 하지만 이 노력은 서인을 주축으로 한 인조반정으로 그 기반이 심각하게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사관들에 의해 광해군이 패륜 행위를 일삼았던 폭군으로 기록된 것은 반정에 성공한 세력이 자신들의 반란을 합리화하기 위해 폐주에게 덧씌운 누명에 지나지 않는다.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중종반정이 연산군 폐출 사건이었다면 광해군과 대북파가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대명 사대를 외면한 점을 이유로 삼았던 인조반정은 그 명분과 무관하게 비주류의 개인적 원한에서 비롯된 반란이자 역모에 불과하다. 결국 광해군은 대명 사대주의자들에 밀려 자신의 실리적 외교론과 현실 감각에 입각한 정치이론을 충분이 펼쳐보지 못한 채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정권이 바뀐 뒤 조선이 겪은 두 차례의 호란은 외교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가늠하게 하는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2015년 집권 당시 중국 전승절에 참석했던 박근혜 대통령에게 시진핑이 보였던 극진한 대우와 깍듯한 태도 뒤에는 한국 대통령이 아닌 한국의 동맹국 미국이 자리잡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힘이 세거나 힘센 이웃을 가진 상대와 호구로 얕보인 상대에 대해 대응을 전혀 달리하는 국가이다. 또한 앞으로도 이런 기조에는 전혀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대통령에 대한 중국의 홀대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태였다. 더불어 이번 방중으로 인해 한국 정부는 미국과 일본으로부터는 배신자로 취급받고 중국으로부터는 양쪽에 엉거주춤 서 있는 회색분자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중립적인 행태와 기회주의적인 태도는 전혀 다르다. 전자에는 의연함과 당당함이 전제되지만 후자에는 저자세와 조급함이 작용한다. 따라서 저자세가 기회주의적이라는 의심을 사지 않으려면 강한 상대에게 확실하게 굽혀야 하는 경우도 있다. 비굴할 정도로 트럼프에 아양을 떤다는 비판을 받은 아베 일본 총리는 트럼프의 마음을 샀다. 하지만 방중 기간 중 베이징대 연설에서 한국도 작은 나라지만 높은 산봉우리인 중국의 통 큰 꿈에 함께 하겠다고까지 언급한 문 대통령은 시진핑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대한민국이 왜 작은 나라이고 중국이 꾸는 꿈에 왜 우리가 동참해야 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시진핑은 문 대통령의 중국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길들이기에 용이한 국가라는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태평양의 소국 팔라우는 지금 타이완과의 국교를 단절하라는 중국의 압박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관광으로 살아가는 이 나라는 중국 관광객이 전체 관광객의 절반이 넘는다. 한국에 글로벌 규범을 밥 먹듯이 어기는 중국이 만들고자 하는 국제질서는 한반도의 미래에 결코 이롭지 않다. 게다가 중국은 주변국들에 대해서 전근대적인 비대칭적 조공관계의 부활을 계획하고 있다. 한국 외교의 결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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