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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환 정경부장

"국내의 자제를 가려 뽑아서 머리를 깎고(변발) 되놈(만주족)의 옷을 입혀서 지식층은 가서 빈공과(賓貢科·중국서 외국인을 상대로 실시한 과거)에 응시하고, 세민(細民)들은 멀리 강남(江南·양쯔강 이남)에 장사로 스며들어 그들의 모든 허실(虛實)을 엿보며 그들의 호걸을 묶어 조직한 다음에야 천하의 이(利)를 꾀함직하고 국치(國恥)를 씻을 수 있지 않겠소."

 북벌(北伐)의 상징적 존재 어영대장 이완(李浣)이 천하 평정의 길을 묻자, 허생(許生)이 이르는 방도다. 인재등용과 훈척들의 추방 및 명나라 후예와의 결탁, 유학(留學)과 무역 등 허생이 제시한 시사삼책(時事三策)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기도 하다. 18세기 소중화주의와 더불어 북벌론은 조선 통치이념의 축이었다. 그 논리는 아주 단순하다. 중화 문명의 수호자인 한족 명(明)이 만주 오랑캐 청(淸)에 멸망했으니, 그 정신만은 순수한 동이(東夷) 조선이 주자의 성리학으로 다듬어진 중화주의를 지켜나가야 한다. 조선이 ‘작은 중화’라면 마땅히 청나라 오랑캐를 물리쳐 중원을 회복해야 한다. 바로 그것이었다. 북벌론은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투항으로 왕좌를 연명한 인조 이후 효종이 조카 소현세자를 제치고 왕위에 오르면서 국가적인 소명으로 세워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북벌론의 실현 가능성은 점점 희미해졌다. 그럴수록 북벌론은 신성불가침의 이념으로 떠받들어졌다. 아무런 내용도 갖추지 못하고 그저 껍데기인 채로 반대파를 공격할 때 유용하게 쓰이는 도그마일 뿐이었다.

 정녕 청을 무너뜨리고 싶다면 각계각층에 침투해 동태를 살피고 청 문명의 핵심을 꿰뚫어야 한다는 허생의 주문에 이완은 쭈뼛거린다. 그리고 한다는 말. "요즘 사대부들은 모두들 삼가예법을 지키는 판에 누가 감히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겠습니까?"

 쯔쯧, 허생이 혀를 차며 한방 내지른다. "그깟 상투 하나를 아끼며 장차 말 달리기, 칼 치기, 창 찌르기, 돌팔매 던지기 등에 종사해야 함에도 그 넓은 소매를 고치지 않고서 제 딴에는 이걸 예법이라 한단 말이오."

 당시 청이 일어선 지 140년이나 지났지만 조선의 엘리트들은 북벌은커녕 청의 구체적인 실상을 알아볼 생각조차 없었다. 압록강을 건너 연경(북경)에 이르는 2천 리 사이의 각 주현의 장수들의 얼굴을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름조차 모르고 있는 실정이었다. 북벌은 단지 명분과 이데올로기의 버팀목일 뿐이었다.

 유정복 인천시장이나 자유한국당 인천시당은 ‘서인부대(서울-인천-부산-대구)’라는 깃대를 꽂았다. 부산을 꺾고 인천이 서울에 이어 제2의 도시로 나아가자는 슬로건이다. 지역내총생산 등 숫자를 두드리니 부산을 누를 수 있다는 예견에서였다. 부산을 무엇으로 이긴다는 지, 어떻게 제친다는 지 구체적인 실천이 담보되지 않았다. 허망한 구호에 그친 북벌론이 떠오른 이유다.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을 아껴 여룡(驪龍)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룡 또한 여의주를 가졌다 해서 스스로 뽐내고 교만하여 저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말똥은 말똥구리에게 생존을 위한 식량이자 구애의 선물로 종족 번식의 매개체다. 남들에게 하찮게 보이는 말똥을 내팽겨치고 남들이 다 보물로 아끼는 여의주를 굴릴 수는 없는 일이 말똥구리의 숙명이다. 설사 말똥구리가 여의주를 갖더라도 용처럼 비와 바람을 부르는 신통력을 발휘할 수 없는 노릇이다.

 「선귤당농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척도를 고정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진리 혹은 가치는 한 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놓여 있는 자리, 배치에 따라 변한다는 말이다.

 초월론에 갇히지 말라는 그 뜻이기도 하다. 모든 대상의 차이를 초월적 기호로 변환하는 것이 초월론이다. 여기서는 차이에서 오는 다양성이 아니라 엄격한 위계나 서열화가 지배한다. 제2의 도시 부산을 왜 이겨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인천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지 도통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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