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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환 정경부장
"대감, 올해에 농사를 지어도 좋을는지 어떨는지…." 성(城)안의 한 노인이 영의정 김류 앞에 꿇고 여쭈었다. 해토머리에 땅이 부풀고 물기가 잡혀서 다랑이 밭에 봄보리라도 심으려면 애벌갈이를 시작해야 할 노릇이었다.

 때는 병자호란, 임금(인조)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남한산성 행궁에 들어앉아 있었다. 청(淸)은 손금처럼 성 안이 내려다보이는 망월봉에 진을 치고, 기름이 번들거리는 홍이포(紅夷砲)로 행궁을 조준하고 있었다.

 도원수 김류에게 노인의 물음은 살길이었다. 나가서 청에 맞서 싸울지, 머리를 조아리고 ‘칸’을 맞아들일지… 머뭇거릴 이유며 여력이 성 안에는 남아 있지 않은 터였다.

 이도저도 안 했다가는 성 안에서 말라 죽을 판이었다. 찬바람과 눈비를 가릴 군졸의 가마니를 말(馬) 먹이로 거두었다. 군졸들은 동상에 걸린 발로 뛸 수 없었고, 썩어 드는 손으로 창검을 쥘 수 없었다. 민촌의 초가지붕도 말 여물로 허물어졌다.

 성 밖으로 나갈 길이 막힌 기병의 말은 마굿간을 차지하고 하릴 없이 먹는 날이 많아졌다. 먹이풀은 바닥이 보였다. 주린 말들은 헐거워진 등가죽과 가시 같은 갈비뼈를 드러내며 숨을 헐떡거리다가 쓰러졌다.

 말 다리를 잡고 살점을 뜯던 군졸들은 이죽거렸다. "이왕 말고기를 먹여 주실게면 살집이 좀 더 있을 때 내어주시지 그랬습니까."

 묘당에선 말(言)의 불꽃들이 치솟아 부딪혔다.

 "전하, 화친의 길은 가당치 않사옵니다. 심양에서 예까지 내려온 적이 빈손으로 돌아갈 리가 없으니 화친은 곧 투항일 것이옵니다." 예조판서 김상헌의 척화론(斥和論)이었다.

 "전하, 앉아서 말라 죽을 날을 기다릴 수는 없사옵니다. 어느 적이 스스로 무너질 상대와 화친을 도모하겠나이까." 이조판서 최명길이 주화론(主和論)으로 상헌의 말꼬리를 물었다.

 말을 요구하는 임금의 시선과 마주친 영상 김류가 한마디 했다. "신은 군부를 총괄하고 있으니 소견이 있다 한들 어찌 싸움과 화친의 일을 아뢸 수 있겠사옵니까." 임금은 천장을 바라본 채 말이 없었다.

 칸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 조선 임금에게 이미 국서를 보냈다. "너는 내가 군마를 이끌고 먼 동쪽의 강을 건너가야 하는 수고를 끼치지 말라." 명(明) 대신 청을 받들고 왕자와 대신들을 인질로 보내 군신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조선은 10년 전 정묘년에 청에 갖은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청이 재차 쳐들어올 때까지 방책 세우기를 미적거렸다.

 한국지엠 사태가 먼 병자년의 무참함을 흔들어 깨운다.

 한국지엠은 군산공장 폐쇄를 결정했다. 조선산업에다가 자동차산업까지 구조조정의 파고가 몰려든 군산은 아수라장이다. 일자리를 잃게 될 군산 주민들은 그야말로 피가 마를 지경이다.

 모 회사 글로벌GM은 거드름을 피우며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2대 주주인 산업은행의 투자, 차입금의 자본투자 전환에 따른 세제혜택, 근로자 구조조정 및 임금조정 협력 등을 요구하고 있다. GM의 수 싸움에는 또 다른 사업장의 구조조정도 끼어 있다. 일자리를 볼모로 한 겁박에 다름 아니다.

 정부의 대응이 무디다. 한국지엠을 실사한 뒤 지원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방침이다. 한국지엠의 부실은 하루 이틀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해 3분기까지 영업적자가 4천366억 원에 달한다. 만성적 적자구조로 영업누적 손실액만 해도 2조5천억 원이 넘는다. 자산 6조4천99억 원에 부채 6조9천269억 원으로 자본잠식 상태다. 매출원가율은 94% 수준으로 이미 경쟁력을 잃었다. 내수시장 점유율이 8%로 소비자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농사는 대본이라 절기에 따르는 것이다. 너희가 농사꾼이 아니냐." 김류가 노인에게 한 대답처럼 에두르고 꾸물댈 때가 아니다.

 끝내 임금은 삼전도로 불려나가 칸 앞 꿇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신하의 예를 갖췄다. 세자와 대군은 볼모로 끌려갔다. 수만의 포로와 전리품이 압록강 너머 청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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