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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오리요리를 잘하기로 소문난 큰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소문대로 그곳 요리사는 정성껏 요리해서 손님들에게 맛있는 요리를 내놓았죠. 어느 날, 행사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의 연회가 그곳에서 열렸습니다. 손님들 앞에 나선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 집은 최고의 오리만을 직접 고릅니다. 그리고 사육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기 때문에 맛이 참 좋은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주방장은 무척 섭섭했습니다. 아무리 신선한 오리라고 해도 누가 요리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다음 날, 손님상에 내놓은 오리요리에는 다리가 하나씩밖에 없었습니다. 그날도 주인은 어제처럼 손님들에게 자랑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어느 손님이 ‘다리가 하나밖에 없다’며 불평하는 바람에 무척 당황했습니다. 화가 난 주인이 곧장 주방장에게 가서 ‘왜 오리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지’를 따졌습니다. "원래 오리 다리는 하나밖에 없잖아요. 이리 와서 사장님이 직접 확인해보세요."

 주방장은 주인을 데리고 오리 사육장으로 갔습니다. 마침 오리들은 모두 한 발을 품속에 감춘 채 서서 졸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주인이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그건 오리들이 졸고 있어서 그렇지."

 이렇게 말하고서는 손뼉을 쳐서 오리들을 깨웠습니다. 그러자 오리들은 숨겨둔 다리 하나를 드러냈습니다.

 "주방장, 저걸 봐! 오리 다리는 두 개잖아."

 이때 주방장이 그동안의 서운했던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사장님이 손뼉을 치니까 오리들이 숨겨둔 다리를 내놓잖아요. 저에게도 요리를 잘한다고 칭찬해주신다면 저도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일하지 않겠어요?"

 「마음에 감동을 주는 이야기」라는 책에 소개된 이 사례를 읽으면서 저를 돌아보았습니다. 자식들에게, 제자들에게, 또는 동료들에게 ‘나는 얼마나 칭찬을 하고 있을까?’를요. 기억이 없을 만큼 칭찬에 인색했던 저를 떠올리는 순간 무척이나 부끄러워집니다.

 유명한 화가에게 어느 노인이 찾아와 자신이 최근에 직접 그렸다는 그림 몇 장을 펼쳐 보이면서 자신이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를 평가해달라고 했습니다. 천천히 그림을 살펴본 뒤 화가는 냉정하게 재능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실망한 노인이 나가려다가 다시 돌아서더니 다른 그림 한 장을 보여줬습니다. 그것을 본 화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대단하다고 평가했습니다. 화가의 칭찬에도 전혀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노인은 실망한 듯 중얼거렸습니다.

 "이 그림은 40년 전에 제가 그린 겁니다. 그 당시 이 그림을 보고 어느 누구도 저에게 칭찬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저는 재능이 없다고 여기고는 화가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질책과 비난 때문에 빗나가는 사람은 있어도, 칭찬 때문에 잘못된 길로 나가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느 연구에 의하면, 집에서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비난과 칭찬을 듣는 비율이 무려 10:1이고, 학교에서는 7:1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칭찬이 인색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비난과 질책을 통해서 일시적인 질서는 확보할 수 있지만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역량은 꽃피우지 못합니다. 비난과 질책은 ‘내가 옳다’라는 교만한 신념으로 상대를 평가할 때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때 상대는 방어를 해야 하고, 그 방어는 결국 원활한 소통을 방해하게 되겠지요.

 TV에 비치는 여야의 관계자들의 말을 모아보면, 칭찬보다는 비난과 질책의 말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일부 경영진들의 갑질 행태를 보면서도 마음이 무척 아픕니다.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 조금이라도 서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겠지요. 누구나 숨겨진 재능이 있습니다. 그 재능들을 끄집어내어 마음껏 세상을 위해 쓸 수 있게 하려면 손뼉을 쳐주는 격려와 칭찬의 말 한마디일 겁니다. 그때 세상은 지금보다 더 화기애애하지 않을까요.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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